언라이트 / 베른하르트 × 라페 × 프리드리히
※인도자(인형)의 이름이 나옵니다.
【Anemonea】
용은 제가 탐욕스럽게 그러모은 재화와 함께 재가 되어 사라졌다. 용병과 군인은 용이 남기고 떠난 잿더미를 짓밟았다.
“이 용은…. 그 용인가. 결착을 이런 곳에서 짓게 될 줄이야.”
“기억이 돌아온 건가요?”
인형의 물음에 프리드리히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대답은 프리드리히가 아닌 베른하르트가 해야 했다.
“그래. 프리드리히뿐만 아니라 나와도 연이 있는 용이다.”
프리드리히는 가만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잊은 기억을 가만히 곱씹다, 무언가 떠올렸다. 붉은 용과 붉은색 용병. 묘하게 기시감이 들면서도, 아니었다면 좋겠다는 바람이 겹쳤다.
“라페, 너도 있지 않았던가? …레지먼트는 남자밖에 없어서, 헷갈리네.”
라페는 잠시간 침묵했다. 인형이 자신을 올려 봄을 깨닫고, 희미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유쾌한 기억이 아니니 굳이 언급은 피했건만. 문득 프리드리히를 돌아보니, 뱉어놓고 후회하는 낯을 띠었다. 제법 재밌는 얼굴인데. 라페는 곧 즐거워졌다. 불쑥 괴롭히고 싶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있었지. 양쪽에, 다.”
양쪽에? 두 사람 모두 의문을 품고 시선을 두었다. 라페는 그저 모호하게 웃어넘긴다. 당신들이 알 필요는 없는 일이지. 알아서 좋은 것도 없어. 그런 말을 하며. 군인들도 더 묻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을 질문은 할 가치가 없다. 세 사람은 암묵적으로 합의힌 후 입을 다물고 앞을 보았다. 오로지 인형만이 땅을 내려 볼 뿐이었다. 마치 눈치라도 보는 모양새였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인형 양.”
라페가 분위기 전환을 노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나 인형은 고개를 들고 어물거리더니,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걷기 시작했다. 감정 반응인가? 형제 군인과 용병이 눈짓을 주고받았으나 알 턱이 없다. 어깨를 으쓱인 라페는 될 대로 되라는 마음가짐으로 흥얼거렸다. 오, 내 사랑, 오, 내 사랑. 오, 내 사랑, 클레멘타인. 네가 없어지고 영원히 사라져 지독히도 슬프구나, 클레멘타인. 인형과 같은 이름이기에 무심코 떠오른 노래였다. 어딘가의 민요라던가. 자세히 알지 못했다. 타의로 지워지고 희게 표백돼, 아득히 머나먼 망각 속에 파묻혔던 편린일 터다.
“협박인가?”
베른하르트가 무심코 말을 흘린다.
“우리가 아닌 다른 녀석이 없다는 거에 감사하라고.”
프리드리히는 한술 더 뜨며 빙글거린다.
“염병, 동료를 가려 사귀어야 했는데.”
라페는 보답으로 주먹질하는 시늉을 했다. 프리드리히는 맞고 쓰러지는 체 하고, 베른하르트는 하찮은 미물처럼 보았다. 그리고, 클레멘타인은.
작은 소녀 인형은 조금 웃고 싶은 얼굴이었다.
“웃고 싶으면 웃어, 인형 아가씨.”
이렇게 말이야. 라페가 양 검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잠시 상황을 지켜보던 프리드리히도 질 수 없다는 듯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으로 베른하르트가 나즈막히 한숨을 쉬며 피곤한 낯을 쓸어내릴 쯤에서야, 클레멘타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텅 비었던 인형에게 처음으로 완벽한 감정이 깃든 순간이었다.
“협박으로 웃는다니, 너도 참 특이한 취향이군.”
“바보 프리드리히와는 다르게 협박이 아니라는 걸 아는 거지.”
라페와 프리드리히는 이전과 달라진 클레멘타인과는 다르게 전혀 변하지 않았다. 서로에게 짓궂게 구는 것은 두 사람의 전매특허였다. 익숙한 투닥거림 사이로 다시금 들려온 한숨은 당연히 베른하르트의 것이었다.
“그만해라. 누가 들으면 네다섯 살 꼬마 놈들이 싸우는 줄 알겠군.”
우후후후후. 그 와중에도 인형의 웃음소리는 멎지 않았다. 프리드리히가 저를 들어 올려 목말을 태우는 순간까지도. 인형이지만, 잠시나마 웃다 질식하는 게 아닐까 걱정될 만큼.
“돌아가서 어콜라이트에게 알린다.”
“좀 찜찜한데. 알려도 되겠어?”
용병의 감을 무시하지 말라고. 경고를 담은 말을 덧붙였으나 베른하르트의 결정에 번복은 없었다.
“적어도 제일 작은 녀석은 좋아할걸. 아가씨, 아가씨, 하면서 제일 잘 따라다니는 게 그 녀석이잖아.”
“그야 그렇겠지. 뭐, 부디 기우였으면 좋겠다.”
좋은 날이니 돌아가면 축배라도 들자고! 프리드리히가 웃으며 외쳤다. 베른하르트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다. 라페는 다소 찜찜한 기분을 삼키고 먹고 싶은 음식을 외쳤다. 3단 케이크! 너는 고기 좋아할 것 같으면서 단것만 먹더라! 프리드리히! 조금 전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대화에 인형이 폭소했다.
폭풍이 오기 전날 같은, 맑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