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선이 책에만 고정되어 있는 동안에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도 잊는다. 그러다 고개를 들면 그제서야 눈에 들어오곤 하는 것이다. 아, 이제는 다른 집에서 살고 있지. 이렇게 새삼스럽게 자각하는 건 우스운 일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전에 살던 집과는 다른 벽면의 색을, 마감재를, 커튼과 창문틀 따위를 인치 단위로 뜯어보지 않을 수 없다. 손이라도 잘못 대었다가는 분명 바스라지고 말 것이 분명한 이 아슬아슬고 안타깝고 애틋한 감각을 소피아는 즐기고 있었다. 지내는 곳이 달라지기 위해 필요한 그 전제가 그에게는 너무나 비현실적일 정도로 설레는 일이었으므로. 그래서 일부러 더 주위를 살피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변화가 드러난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눈치채고 싶어서.

 그건 어쩌면 묘하게 중독성이 있는 일이기도 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확실히. 창문틀을 타고 넘어가 그 너머의 달라진 풍경을 바라보다, 문득 들려온 소리에 곧장 방향을 바꾸어 현관문이 있는 쪽을 바라볼 때는 더더욱. 꼬고 있던 다리를 풀며 곧바로 몸을 일으키고, 그런 뒤에는 평소보다 큰 걸음으로 현관에 도착할 때까지, 그 순간은 아주 찰나에 가까워서 기억을 하고 말 것도 없었다.

 "다녀오셨어요!"

 문을 부드럽게 열고, 붙잡고, 퍼시벌은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머리카락, 집을 나서던 아침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 단정한 얼굴, 마찬가지로 여전히 말끔한 옷차림, 정중한 걸음걸이, 그리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의 인사에 화답하는 가벼운 눈짓. 그저 반가운 까닭에 가루가 쏟아지는 듯이 웃으면서도 소피아는 또 문득 깨달았다. 아, 혼자 집에 있을 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는 것도, 전에 살던 집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일이구나, 하고. 그새 퍼시벌은 소피아를 앞질러 큰 걸음으로 거실로 들어섰고, 소피아는 그 보폭을 놓치지 않기 위해 조금 더 걸음을 서둘러야만 했다.

 "저녁 식사는 했나?"

 "네에, 시간이 이미 늦었는걸요."

 소피아는 고개를 돌려 아홉시를 지나고 있는 시곗바늘을 흘끔 바라보고는, 다시 퍼시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규정된 시각보다 퇴근이 늦었음을 인식하고는 있었지만 분명 알아서 잘 하시리라 생각하며 의식적으로 죽였던 걱정이, 실제로 알아서 잘 하시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지금껏 제가 걱정할 일을 한 적은 없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러니 차라리 제 처신이나 잘 하는 것이 백배 유의미한 일이라는 사실 역시 제가 가장 잘 알았으나, 상대가 상대인 만큼 마음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걱정하고 있다는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아서, 그런 기색을 가능한 억누르고, 소피아는 퍼시벌에게 툭, 몸을 기대며 속삭였다.

 ‌"퍼시는요?"

 "간단히 먹었네. 걱정할 거 없어."

 "……걱정이요?"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작은 틈으로 공기가 팡, 터지는 듯이 들려온 사내의 낮은 웃음소리가 괜히 부끄러워져서, 소피아는 고개를 머쓱하니 소파 저 너머로 던졌다. 제 눈을 보고 속내를 읽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한 일이었으나 그렇게라도 피하지 않으면 속마음을 죄 읽혀버렸다는 사실이 탄로날 것만 같았던 까닭이었다. 분명 이미 탄로나 있는 일이겠으나.

 "별 일은 없었고?"

 그러니 이렇게 이야기를 돌려주는 것도 퍼시벌의 배려였을 것이다. 소피아는 그것을 또렷하게 인지하고, 너무나 고의적으로 그 배려에 응석을 부려 대화의 주제를 바꾸었다.

 "으응, 그냥 책 보고……. 아, 편지가 몇 통 왔어요."

 소파에 걸터앉으려던 의도를 거두고, 대신 조금 더 먼 곳에 있는 테이블까지 걸음을 옮겨 가면, 테이블 위로 몇 장의 편지가 흐트러져 있었다. 퍼시벌은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쳐 두고는, 그 편지들을 주욱 훑어보았다. 평범한 안부 편지, 초대장, 축하 편지 따위를 지나, 발신인과 수신인이 보이지 않도록 뒤집혀있는 편지봉투에 시선이 머문다. 단순한 호기심에 그는 손을 뻗었다. 그러면 움찔, 바로 앞에 서있던 작은 어깨가 잠시 떨려온 듯 했다.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나 생각하며 일단은 편지를 뒤집었고, 그런 뒤에는 그 이유를 깨달아 낮게 웃었다. 수신인이 잘 보이도록 편지를 바꿔 들면서.

 "당신 앞으로 온 건데, 열어 봤어야지."

 그러면 편지의 수신인은 한참을 망설이는 듯이 눈을 좌우로 굴리다가, 이내 힘겹게 한 마디를 쥐어짜냈다.

 "……제, 제 거 아닌데요?"

 두 눈을 뻔뻔스럽게 뜨고 두어 번 깜빡이는 폼이 되려 더 수상했으나, 퍼시벌은 그 말에 장단을 맞추어 주겠다는 듯이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그래? 이 집에 다른 소피아 그레이브스가 있었나?"

 "그, 그, 그……, 다, 다른 집으로 갈 편지가, 잘못 왔다든지……!"

 "흐음, 보낸 사람도 확실하고, 편지가 잘못 배송될 일은 없을 텐데."

 "그, 그게, 그게……!"

 멋드러지게 흘린 글씨였으나 글자를 알아보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터였다. 수신인을 적는 자리에는 이 집의 주소가 있었고, 지난 달 20일을 기하여 달라지게 된 이름이 있었다. 이름의 주인은 그 이름을 한참 응시하다, 시선을 돌리며 어쩔 수 없이 그 편지를 받아들었다. 푹, 안도인지 체념인지 모를 한숨이 편지 위를 덮었다.

 이름이 바뀌는 것 자체를 낭만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것이 기혼임을 나타낸다면, 지극히 극단적인 낭만으로 포장할 생각은 없는 자신의 어떤 결정이 있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일어나게 된 변화의 결과 중 하나가 그것이었으므로, 소피아는 자신이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 좋아서 변해버린 제 이름이 좋았다.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바뀐 제 이름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이내 도망치듯 퍼시벌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안 열어볼 건가?"

 "……그러니까 저 아니래두……."

 "흐음."

 이제는 그만 인정하라는 듯이 허리에 팔이 둘러져 오고, 볼에는 짧은 입맞춤도 닿아 왔다. 자신을 부드럽게 달래고 도닥이는 듯한 시선까지 받으면 이제는 모르는 척 할 수도 없어서, 소피아는 제 허리에 감긴 손 위로 제 손을 겹치며 손 끝으로 테이블 위를 더듬었다. 툭, 이내 손가락 끝에 지칼이 닿았다. 얼굴의 열기는 여전히 화끈화끈하게 건재했다.

 잘 마감되어 있는 편지봉투의 끝을 칼로 뜯어 열면 금박이 들어간 하얀 카드가 있었다. 반으로 접힌 카드 안쪽에는 형식적인 결혼 축하 문구가 있고, 본론으로 만찬 초대가 있고, 군더더기 없이 말끔한 마무리가 있었다. 봉투의 겉면에서는 수신인의 이름에 주의를 빼앗겨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발신인을, 소피아는 카드의 끄트머리에 가서야 확인했다. 이름은 익숙한데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 어느 부인이었다. 뵌 적이 있었던가, 없었던가.

 "……답장은 내일 오전에 쓸래요."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카드를 갈무리해 봉투와 함께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편지가 개봉되는 것에서부터, 갈색 눈동자가 정갈한 펜자국을 찬찬히 따라 움직이고, 그런 뒤에 답을 생각하는 듯이 가볍게 구르는 것까지 옆에서 차근히 지켜보았던 퍼시벌은, 그를 안고 있던 팔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이 지칼을 집어들었다. 내일 오전에 답장을 할 시간이 충분히 있을 누구와는 달리, 안보부 국장인 저는 분명 업무로 바쁠 것이었으므로.

 퍼시벌이 자신의 앞으로 도착한 편지 하나를 집어 들고 지칼을 밀어넣으면, 토독, 하고 종이가 튿어졌다. 그 파열음에 가볍게 귀를 기울이던 소피아는, 이제 역할이 반대가 되었다고 선언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퍼시벌의 등을 꼭 끌어안고 팔에 고개를 기댔다. 장난스럽게 턱으로 그의 팔을 꾹, 꾹, 누를 때마다 셔츠의 빳빳한 천이 턱 아래에서 바스락거렸다. 변해버린 실내의 인테리어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강도로 변화를 나타내던 제 이름이 여전히 눈앞에 선명했다. 그 변화를 이제는, 적어도 처음에 비해서는, 조금 더 느긋하고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한 공간 안에 다른 이와 함께 존재하는 것도, 어느새 조금은 당연한 일이 된 듯 했다.

 "아, 그리고."

 "네?"

 "두 달 정도 후에 출장을 가게 될 것 같네."

 퍼시벌이 편지를 눈으로 읽어 내리며 갑작스럽게 꺼내든 이야기를 듣고, 소피아는 잠시 그 내용을 곱씹는 듯이 침묵했다. 두 달 후, 라면 11월의 일일까. 먼 미래의 일이라면 먼 미래의 일이지만, 출장이라는 말은 그리 달갑지 않다. 그 때가 된다면 이 낯선 일들도 조금은 익숙해져서, 그가 없는 시간이 더 낯설게 될까. 마른 입술을 벙긋거리노라면 자신의 침묵이 다소 이례적일 정도로 길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으렇구나. 어디로요?"

 "유럽으로."

 "바쁘시네에……."

 조심히 다녀오세요, 하고 웅얼거리는 말을 덧붙였으나, 아직까지는 그리 현실감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 때가 되면 슬슬 겨울이겠지. 그런 정도의 감상만이 뇌리에 머물다 사라졌다. 소피아는 이제는 퍼시벌의 등을 턱으로 꾹, 누르다, 키득거리며 웃었다.

 "가기 전에 저랑 많이 놀아요."

 두 달 후의 일을 생각하기에는 아직, 새롭고 낯설어서 설레는 일들이 너무 많았으므로. 그 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은 그 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