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프로스트 / 서리별
독일을 갔다 온 후는 바로 개강이었다. 타지에서 한 수강신청은 첫강의와 마지막 강의가 3시간 텀이 나는 공강이 생겨버리고, 어플로 기록해보니 게임에 나오는 8비트 거미마냥 시간표가 짜여졌다.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짜여진 시간표. 나쁘지만은 않았다. 어차피 상담소 조교로서 오후엔 꼭 나와야 했기에, 강의가 비는 시간에 상담소에서 책을 보거나 잠을 자곤 했다.
내담자를 위해 놓았던 푹신한 소파에 누워서 잠들어 있자면, 교수님이 자켓을 덮어주기도한다. 일어나면 피곤하면 집에서 자게, 하고 핀잔을 주시지만, 이제는 그 것 또한 나름의 애정표현이라는 걸 안다.
오늘도 그렇다. 강의가 3시간이 비어 통 잠을 못자는 바람에 소파에 누워 잤는데, 자켓을 덮어주셨다. 예전 같으면 내가 일어나든 말든, 책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을텐데 오늘은 나를 보고 먼저 깼나 물어봐 주신다.
“깬 건가.”
“저 얼만큼 잤어요?”
“내가 온 뒤 부터 잤으니, 한 5시간은 잤겠군.”
“예?”
벌떡 일어나 시간을 확인해보았다. 분침은 2, 시침은 4를 가리키고 있었다. 내 강의시간은 3시부터 5시인데.
자켓을 정리하고 허겁지겁 신발을 신으며 시간표를 재확인하니, 프로스트 교수님의 수업이었다. 교수님은 왜 여기있지? 고개를 기울이자 속을 빤히 본듯이 한숨을 쉬며 쳐다보았다.
“자네가 그렇게 피곤한 얼굴로 자는 거 보니,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일 것 아닌가. 가끔은 이렇게 쉬는 것도 효율이 오를 걸세.”
“언제부터 다른 학생들을 그렇게 챙기셨다고?”
“…….신아 네가 걱정돼서.”
최근에 상담소에 와서 잠만 잤나. 천천히 생각해보니 그랬다. 조퇴는 하지 않았지만 꾸벅꾸벅 졸다 내담자가 오면 발작하듯 일어났고, 겨우 눈을 떠 차를 내오거나 심리분석 평가지의 결과를 도출해내는게 대부분이었다.
찬바람이라도 쐬면 잠이 가시려나, 해서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완연한 가을이 와, 단풍이 떨어지고 있었다. 옆에 온 프로스트 교수님에게 살짝 눈길을 돌리다 단풍을 바라봤다.
“교수님, 저 단풍이 다 떨어지면…….”
“나도 떨어지겠지? 가을 타는 건 알겠네만, 마지막 잎새 같은 말 하지 말게.”
“아니. 비슷한데 그 말은 아니에요.”
“그럼 뭔가?”
“4학년이 되겠죠.”
단풍을 보며 이야기하니 한껏 씁쓸함이 더했다. 교수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와 비슷한 표정, 읽혀지는 건 아쉬움이었다. 적색 눈동자에 오롯이 나만 담겨있었다.
“오늘은 일찍 퇴근하지.”
“교수님이랑 같이 퇴근할래요.”
“그래, 같이.”
“교수님은 5시까지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었어요?”
“내담자도 없고, 송선 한테 대신 맡겨도 되는 일이야.”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뭐예요?”
“상당히 집요하군. 캠퍼스를 걸으며 할 말이 있어서 그렇다네.”
“그럼 옷 챙길게요. 이건 교수님 옷.”
자켓을 돌려주고 털실로 짠 가디건을 입었다. 따스한 느낌이 드는, 엄마가 짜준 옷. 교수님의 손을 잡고 걸었다. 따뜻한 느낌이 그대로 전해지는 건 옷뿐이 아니라 교수님 손에서였다. 완연한 가을, 우리가 만난지도 근 1년이 다되었다. 처음 만났을 땐 검은머리에 백발. 성격 또한 극과 극이었는데, 지금은 내가 백발이 되었듯 교수님도 따뜻해지고 있었다.
수업시간에 가까워서 그런지 문과대학까지 걷는데 사람이 없었다. 낙엽도 떨어지고, 교수님은 내게 집중하고 있고. 얼마나 좋은가.
“신아야.”
“네, 교수님.”
“네게는 이게 싸구려라고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프로포즈하듯 한쪽 무릎을 꿇고 왼손을 잡았다. 차가운 금속 느낌이 손끝에서부터 손가락 끝까지 내려온다. 금반지 위에는 ‘Frost’ 라고 적혀 있었다. 교수님은 제 손가락을 부끄러운 듯 보이더니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자네들이 말하는 '의미'를 두고 만들었다네. 자네 반지에 내 이름을 새긴건,”
기쁜 마음에, 눈물이 보일까봐 먼저 안겼다. 그렇게 부가설명 안해도 알아. 교수님에겐 내가 있고 내겐 교수님이 있다는 뜻이잖아요. 작게 귀에 속삭이니 알면 됐어. 하고 일어서서 입을 맞췄다. 누가보면 어떡하지, 라는 마음에 주위를 둘러봤는데 아무도 없다.
“대담해지셨네요? 저랑 연애하는 거 들키면 잘리는 건 교수님일텐데.”
“재벌가의 애인인데 상관없지 않나.”
“그거 불법이거든요?”
“교수직을 내려놓게 되더라도, 신문이나 기사로 나가는 건 막을 거잖나.”
“당연하죠. 내 사람 내가 지켜요.”
하하, 소리 내어 웃는 교수님을 보니 사람이 이렇게도 변화되는 구나 싶었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마냥 따뜻하다.
“그럼 자네는 내가 지키도록 하지.”
그래, 이렇게 믿음이 가는게 내 애인인데.
이번 겨울도 따뜻하겠지. 교수님과 함께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