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신연의 / 왕천군 × 담운
선계대전은 곤륜산과 금오도 양 측에 큰 피해를 입힌 채 끝났고, 선인계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신화시대의 끝. 멸망을 앞둔 은나라. 점점 조가에 가까워지는 주나라의 군대와, 깨달음을 얻으러 태상노군을 만나러 간 태공망…. 모든 것은 ‘계획’대로 흘러가고, 자신 또한 그 계획을 위해 두 개의 영혼을 소모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셋인가.’
제 영혼은 아직 하나 남아있지만, 무릎께에 누워있는 이 혼백은 곧 끝을 맞이할 것이다. 모든 것을 위한 계획대로, 자신이 원했던 결과대로.
“다 자업자득이야.”
물론 누구의 업인지는 알 수 없다. 자신의 업일 수도 있고, 자신을 따라 험한 길에 오른 상대의 업일 수도 있지.
왕천군은 눈을 뜰 기미가 보이지 않는 담운의 손을 매만지며 마른 한숨을 내뱉었다.
세 번째 파편,
봉신계획 시작 후 약 10여년 뒤.
─???의 내부.
담운은 선계대전에서 옛 스승을 만나게 되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왕천군이 멋대로 동행하게 만들어 조우하게 되었다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몇 백 년 만의 재회는 본래라면 애틋한 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했을 터지만, 서로 적으로 만난 상황에서 어느 누가 그런 간질간질한 감정을 가질 수 있었을까. 잠깐의 혼란, 날카로운 대립. 옛 인연과 자신이 지켜야 하는 목숨 사이에서 망설이던 담운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왕천군을 위해 보패를 발동했고, 그것이 그대로 그의 최후의 전투가 되고 말았다.
‘어라, 살았구나? 왕천이가 구해준 거니잉? 어쩜, 사이좋기도 하지♡’
달기의 감탄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있었다. 왕천군은 그의 반응이 퍽 기만적으로 느껴져 눈살을 찌푸렸다. 곤륜산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수준의 전투원과 싸웠고, 상대의 보패를 직격으로 맞았음에도 생존했으니 살아남은 것 자체에 놀라는 것은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왕천군은 알고 있었다. 그때 달기가 놀라워 한 것은, ‘살아 돌아온 사실’ 자체가 아니라 ‘제가 살려준 것’ 때문임을.
‘월섬창에 맞았으니, 영혼이 깨져버렸을 거라구? 육체는 회복할 수 있어도 혼은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잖닝♡ 그런데도 굳이?’
‘굳이.’ 그 단어 하나에 들어있는 수많은 유감을 어찌 제가 모를 수 있을까. 하지만 왕천군은 구태여 달기에게 쓴 소리를 하거나 불편한 티를 내지는 않았다. 제가 반응하면 반응할수록, 저 여자는 즐거워할게 뻔했으니까. 달기에게 담운은, 자신을 자극할 수 있는 수단이 되는 것 외에는 정말로 어찌되어도 상관없는 존재였기에.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거뒀을 뿐이야. 당신 도움은 필요 없어, 죽여도 살려도 내가 알아서 해.’
냉정한 대답에 달기는 더 이상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흥미진진하다는 얼굴로 낮게 소리 내어 웃기는 하였다. 그래. 봉인뢰에 있을 때에는 배려도 없이 강압적으로 의지하고, 밖으로 나오게 된 후에는 실컷 부려먹은 주제에 이제 와서 동정하듯 목숨을 살려두는 게 웃길 수도 있겠지. 제가 생각해도 헛웃음이 나오는데, 제 3자의 눈에 우습지 않을 리 있겠는가.
“하아.”
무거운 한숨이 입 밖으로 제대로 흘러내리지 못하고 도로 목구멍 아래로 가라앉는다. 왕천군음 침묵한 채 제 무릎에 누워있는 담운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담운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분명 자기 자신이었다. 문중과 황비호를 확실하게 봉신시키기 위해, 제 3자가 끼어드는 걸 막기 위해서 제 두 번째 영혼은 망설이지도 않고 담운을 적진에 던져두었고…,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이 꼴이었지. 확실하게 죽지는 않았지만, 회복될 가능성이 없는 치명상을 입은 채 숨이 끊어져가는 꼴은 제게 느낄 수도 없는 동정이라는 감정을 머릿속에 떠오르게 한다.
정말이지, 끌려 다니느라 바빴던 삶이 아닌가.
제 모든 사건은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고, 그 선택에는 거기에 걸맞은 각오가 있었다. 물론 원시천존에게서 예상치 못한 불이익을 받거나 생각지도 못한 변수를 겪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 모든 것은, 결국 본인이 받아들이기로 한 난관이었다.
하지만 담운은 어떻던가. 제가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고, 무엇 때문에 정말로 금오도로 오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채 겁도 없이 제가 걸어갈 가시밭길에 동행인을 자처한 것이 아니던가.
“…멍청이….”
제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중간에라도 도망쳤다면 원망이나 실컷 받고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을 텐데. 모순된 마음이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 알지만, 왕천군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곁에 있어줬으면 하는 제 욕심과는 별개로, 제게 정말로 아군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는 담운뿐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상대의 죽음을 앞두고 차라리 담운이 중간에 제 손을 놓았었다면 좋았을 거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참으로도 뒤늦게 말이다.
“…미안해, 역시 무리였던 걸까….”
“!”
혼잣말에 대답이 돌아오길 바란 건 아니었다. 왕천군은 자신이 뭐라고 중얼거렸는지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간만에 정신이 돌아온 상대와 눈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초점이 희미한 검붉은 눈동자는 느리게 깜빡이며 힘겹게 제 시선을 쫓고 있다. 혹시 눈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인가. 자신을 코앞에 두고도 헤매는 담운이 못마땅한지, 왕천군은 답지 않게 상체를 숙여 서로의 거리를 좁혀주었다.
“…여긴, 어디야?”
“내가 보이긴 하냐.”
“응….”
시선은 겨우 맞았지만, 상대의 의식은 여전히 흐릿해 보인다. 이래서야 정말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창백한 얼굴 가득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에 뒷목이 서늘해진 왕천군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겨우 말을 내뱉었다.
“내 공간보패 안.”
“응?”
“어디냐고 물었잖아. 기억 안 나냐?”
“아….”
‘그랬었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린 담운은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최대한 돌려가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나, 진거지…?”
“이겼다고는 못하지. 내가 낚아채가지 않았으면 죽었을 테니까.”
“역시 그렇구나.”
늘 들어왔던 체념 가득한 말투가 오늘따라 낯설게 다가온다. 왕천군은 여기저기로 움직이는 상대의 시선을 턱을 잡아 당겨서 제 쪽으로 고정시켜놓고 말을 이어갔다.
“나한테 할 말 없냐.”
“…어?”
“할 말 없냐고.”
자신은 시간이 많지만, 상대에겐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담운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못 해둔 말이 있다면 털어놓기를, 궁금한 것이 있다면 물어보기를, 원망하고 싶다면 지금이 기회니까, 그걸 놓치지 마라는 듯.
하지만 상대의 의도와 달리, 담운은 옅게 인상을 쓰더니 시선을 돌려버렸다.
“미안해.”
“뭐?”
“미안해…, 도움이 못 된 거 같아서.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는데, 나에겐 무리였나 봐.”
아니다. 이런 말을 해야 할 때가 아니다. 염두에도 없던 사과에 답답함이 차오른 그는 무의식적으로 엄지를 입가로 가져가, 까득까득 소리 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담운이 이 지경이 되도록 몰아넣은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불합리한 원망과 책임전가로 죄책감을 심은 것은 달기와 자신의 공동작업이었지만, 결정적으로 담운을 움직이게 만든 건 늘 제가 던진 몇 마디의 말이었으니까.
그래, 제가 이 꼴이 되도록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야 ‘왜 이러느냐’는 식으로 나오는 것은 기만이지. 왕천군은 새삼스럽게 본인의 이중적 태도가 우스워 다른 방식으로 화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너, 죽을지도 모른다는 건 아냐?”
“…….”
“아니, 죽을지도 모르는 게 아니라 확실하게 죽을 거라고. 원래 이런 건 본인이 제일 알 아는 법이니 내가 말할 것도 없겠지만.”
“그러게….”
“그러게, 는 무슨. 그걸 알면서도 한다는 말이 고작 그거냐?”
원래 인간은 죽음을 앞에 두면 비장해지거나 용감해지는 법이었다. 아니면, 겁이 없어지거나 솔직해지기라도 했지. 하지만 담운은 그 중 어느 쪽도 아닌 것 같았다. 적어도 왕천군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유언이 ‘미안해’라니. 너답긴 한데, 너답기 때문에 어이가 없네.”
“…하지만 사과하고 싶으니까.”
“대체 뭘?”
“같이 있어주기로 했는데, 못 지키게 되니까….”
조곤조곤 대답하는 담운의 표정이 식어가는 체온과 달리 너무나도 온화해, 왕천군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상황과 방향성을 잃은 원망이 만들어 낸 화는 분명 머리끝까지 차올라 있었지만, 도무지, 저 일관적인 상냥함에는 이길 수가 없어서.
“왜 나는 아무것도 지켜내질 못한 걸까.”
“…너….”
“너를 몇 번이나 잃어야 모든 게 끝나는 걸까….”
담운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는 알고 있다. 봉인뢰에서 나가기 전 달기의 손에 의해 ‘왕혁’을 잃은 것도, 양전과의 싸움에서 언제나 곁에 있었던 자신을 잃은 것도, 담운은 모두 본인이 못나서 지키지 못한 거라 생각하겠지. 전자는 몰라도, 후자는 확실하게 자신의 계획의 일부였는데, 그것도 모르고. 멍청하게.
“나머지 한 쪽도, 죽은 거야?”
“널 사지로 몰아넣은 쪽?”
“…….”
이 와중에도 제가 세 번째라는 것은 알아보는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상대는 지금 대단히 차분하고 이성적인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그편이 더 괴로워서 표정이 일그러졌다. 차라리 사경을 헤매느라 헛소리를 하는 편이 낫지, 제정신으로 저런 소릴 하고 있는 걸 듣고 있자면 속이 뒤집어지니 어쩌겠는가. 마른세수를 한 그의 입에서, 소리 없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죽었지. 하지만 그러려고 나선 거였으니 너랑은 관계없어. 오히려 개죽음 당하는 건 네 쪽이야. 시간 끌기 용으로 던져진 거니까.”
“도움이 됐다면, 그걸로 됐어.”
“젠장, 말이 안 통하네…!”
겨우 가라앉은 화는 다른 색으로 바뀌어 그의 밖으로 흘러넘친다. 머리로 생각할 틈도 없이 상대의 양 어깨를 잡아 누르는 왕천군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채근했다.
“네 눈에는 분명 내가 이상한 놈 같겠지. 아니, 늘 미쳐있던 놈이니까 별로 놀랍지도 않으려나? 언제는 ‘책임을 져라’고 말하고, 언제는 ‘네 잘못이다’라고 하고, 이제 와서 왜 사과 하냐며 화를 내고 있으니 어이가 없는 게 당연해. 내 입으로 말하면서도 기가 차니까.”
“혁아.”
“하지만 내 눈엔 네가 더 이상한 놈이야. 사태파악도 못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을 텐데? 넌 그냥, 그 봉인뢰 안에서 바보 같은 선택을 해서 몇 백 년 동안 나한테 휘둘린 거야. 날 원망할 법도 하지 않나? 아니면, 정말로 내가 너 때문에 이지경이 된 거 같아? 착각 하지 마. 착각 하지 말라고! 젠장, 네가 그때 금오도에 안 왔으면 넌 안 죽었어도 되는 목숨이었어! 나 때문에 넌 이지경이 된 거라고!”
조금씩 감정이 실리던 목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이내 소리치는 것이나 다름없는 형태로 바뀌었다. 못해도 200년은 쌓아둔 감정은 강렬했지만, 당연하게도 그의 외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지친 그는 더 이상 화를 낼 기운도, 원망할 기운도 없었다.
꽉 잡은 새하얀 어깨를 놓은 왕천군은 호흡을 가다듬고 입술을 깨물었다. 담운은 숨을 고르는 그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나직하게 물었다.
“내가 이렇게 된 게 싫은 거구나.”
“…….”
“…난 괜찮아. 네 곁에 있을 수 있었으니까, 그걸로 됐어.”
“네 녀석에겐 내가 그 정도 가치가 있었나? 목숨도 아깝지 않을 만큼의?”
“응.”
힘없는 목소리로 답하는 긍정의 말이 무엇보다도 단호하다. 멍으로 엉망이 된 손가락으로 주변을 더듬던 담운은 머뭇거리는 왕천군의 손을 마주잡더니, 꺼져가는 촛불처럼 희미한 말을 이어갔다.
“내버려 둘 수 없는걸, 혁이는. 내 소중한 사람이니까.”
“…바보 자식….”
“…응, 바보 같지, 역시? 이젠 그 약속도 못 지키게 됐으니까.”
‘내가 여기 있어줄게.’ 앳된 목소리의 환청이 머리를 어지럽게 한다.
금세 조용해져 죽은 듯 잠들어 버린 담운의 손을 놓지 못하고 침묵하던 왕천군은 붉고 푸르게 물든 그 손을 제 뺨으로 가져갔다.
그러고 보니 봉인뢰에서는 정반대였지. 거기서는 언제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누워있는 건 자신이었고, 그런 자신을 달래주던 건 담운이었다.
무기력했던 자신과 달리 그때의 담운은 얼마나 필사적이었던가. 무릎을 베고 누워있게 해주거나, 자장가를 불러주기도 하고, 요괴들이 지껄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귀를 막아주거나 하루 종일 껴안아주는 걸로 체온을 나눠주기도 했지. 물론 이 필사적임은 그 시절에만 한정된 이야기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언제나, 언제나 담운은 제가 관련된 일에 있어서는 더없이 필사적이었다.
“…하….”
그 어린 것은 본인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주었는데. 지금의 자신은 담운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다 죽어가는 몸을 껴안는 건 힘들지 않겠지만, 어째서 제 팔은 움직이지 않는 걸까. 사과의 말을 내뱉는 것은 쉽겠지만, 지금까지 제가 밀어붙여온 모든 것이 고작 말 몇 마디로 용서받을 수 있던 것이던가.
멍청했다. 상대만큼이나, 자신도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계획을 위해 잘라내기로 한 목숨이라면 매정하게 죽게 내버려 두었어야지, 어째서 여기까지 가망 없는 생명을 데려오고 만 것인가. 도대체 어쩌자고. 그리 소중했다면, 불합리한 원망이나 시기를 거두고 아껴줬어야지. 아무리 미쳐버렸다 해도 제 마음대로 끌고 다녀놓고 망가지니 울어버리다니. 사리분별을 못하는 아이나 다름없는 행동 아닌가.
“…담운.”
결국 봉신계획의 뒤처리를 위해 살아가는 제게 허락된 유일한 것은 이 계집아이 하나뿐이었는데. ‘왕천군’으로서의 일이 모두 끝나갈 때쯤에서야 유일한 것의 귀중함을 알게 되는 것은 제가 너무 지쳤기 때문일까. 너무 지쳐서, 마음을 외면할 기력도 없어서, 늘 기대던 그 품에 간절히 기대고 싶어져서일까.
“최악이군.”
하지만 이렇게 자조하면서도, 그는 제가 저지른 일에 대해 후회하지는 못하지. 수행해야 할 일을 위해 제 혼도 둘이나 소모한 자신이니까. 유일한 아군도, 정인(情人)도, 결국 제 사명을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끊어낼 자신이니까 어떻게 후회하겠는가.
“최악이야….”
주어 없는 말을 중얼거린 그는 창백한 손을 놓아주고 눈을 감았다.
시계 초침소리만 요란스러운 방에는, 살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조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