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널 판타지14 / 오르슈팡 × 모험가(애슐리)
Perception
영웅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게 틀림없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했다. 애슐리는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직 긍정하기에는 이르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이런 게 사랑일지도 몰랐다. 애슐리는 경험이 없는지라 그렇게 추측만 했다. 그것도 거의 확신의 단계에 들어서기는 했지만.
상대에게 자신의 마음 한 켠을 자리내주는 일이다. 누구든 조심스러워지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닌 척 연기할 생각은 없었다. 신중한 것과 시치미를 떼는 것은 다르다. 숨기는 것은 떳떳하지 못한 것과도 같다. 그러니 애슐리는 능청 떨지 않았다. 그럴 수 있는 성격도 아니었지만.
새벽 5시, 검은장막 숲 동부삼림의 가시나무 숲길에서 연령초 더미를 뒤지고 온 영웅의 손은 흙투성이였다. 연령초는 강장제를 제작하는데 사용되는 재료이지만, 오늘은 그 쓰임새가 다른지 꺾은 연령초는 평소처럼 곧장 가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다만 흙이 묻은 손에 소중히 쥐여졌다. 하얀 연령초 더미. 저마다 푸른 잎사귀를 세 개씩 거느린 채 애슐리의 손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은 흡사 들꽃을 서툴게 엮은 꽃다발 같기도 했다.
애슐리는 동부삼림의 서쪽에 위치한 꽃꿀 나루에서 그리다니아로 향하는 나룻배를 얻어 탔다. 맑은 강물에 흙 묻은 손과 작은 꽃다발을 씻어낸 후, 손에 든 연령초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애슐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평소의 그녀를 생각하면 꽤 유난스러운 행동이었다. 하지만 오늘이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이 행위를 익숙하게 생각해줬으면 하는 마음 반, 특별하게 생각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또 반. 하지만 어느 쪽이든 정성을 알고, 기뻐해줬으면 하는 마음이라는 건 같았다.
곧장 그리다니아에서 떠나와 북부삼림을 거쳐 커르다스 중앙고지로 향하는 길. 그리다니아의 칼라인 카페에도 들리지 않고 지나가는 길목에 있던 가을박 마을에서도 쉬어가지 않았다. 에오르제아의 도시국가 삼국에서 쫓기는 신분이라지만, 그것이 애슐리가 걸음을 서두르게 하는 사유가 되지는 않았다. 탑승하는 초코보를 벌써 3마리째 교체해서 달리고 있으니 사람이 지칠 법한데도 애슐리의 두 눈은 화창한 햇살 아래 빛나는 눈송이의 결정체마냥 반짝였다. 그렇잖아도 커르다스에 가면 추위에 꽃이 시들 것이다. 그러니 이동경로라도 단축하여 최대한 성한 상태의 꽃을 내보이고 싶은 마음이 그녀를 재촉했다.
커르다스로써는 드물게 눈이 그치고 쾌청한 날씨였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하늘이 펼쳐져, 햇볕을 받은 눈밭의 얼음 알갱이들이 반짝반짝 빛났다. 용머리 벌판을 지나 용머리 전진기지에 이른 애슐리는 축사에 투정 부리는 초코보를 묶어두고 서둘러 지휘실로 향했다.
이른 아침이지만 포르탕가의 휘하에 있는 용머리 전진기지의 기사들은 부지런한 대장을 두어 새벽부터 기상하기 바빴다. 아침훈련이 있는 터로 주된 기사들이 빠져나가고, 순번을 정해 차례가 아닌 기사들이 애슐리를 반겼다. 기사들 개개인에 대해서는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지만 기사들에게는 그녀가 에오르제아의 영웅이므로 기억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물론, 단순히 그뿐이었다면 얼굴조차 볼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영웅은 그들이 모시는 주인 되는 오르슈팡의 애틋한 연… 아니, 절친한 친구이므로 기지에 왕왕 걸음하곤 하였으니 머리에 남을 수밖에 없는 얼굴이었다.
애슐리는 기사들에게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그녀가 워낙 말수가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기에-영웅이 그들의 주인에게조차 말을 길게 하는 편이 아니기 때문에-기사들 사이에 다른 소문이 퍼지는 일은 없었다. 다만 기사들은 이 진전 없는 고구마 커플(예정)을 위해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더란다. 예컨대, 이런 식으로.
“오르슈팡님! 지금 영웅님이 돌아오셨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주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또는, 하던 일을 잠시 내려놓고 번쩍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환해지고 눈매가 유연해졌다. 기쁨을 안면에 가득 담은 남자가 영웅을 발견한 위치를 묻고, 그곳을 향해 한달음에 달려 나갔다. 온몸으로 환희를 표현하는 주인을 보며 주위의 기사들이 뿌듯한 얼굴로 코를 쓱 닦았다.
주위 사람들의 지극한 도움이 있었지만, 그들은 한 가지를 간과했다. 그들의 주인이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간간히-조금의 악의도 없이-영웅을 난처하게 만드는 일 말이다.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오르슈팡은 지휘관실 앞에 당도하자마자 힘차게 문을 열어젖혔다.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하자 기뻐 반색했다. 등 뒤로 커다란 소리가 들리자 순간 움찔, 하고 등이 움츠러 들더니 곧 조심스럽게 옆을 돌아보았다. 오르슈팡이 시야에 가득 들어찬 영웅의 금색 눈동자가 순간 평정을 잃고 세찬 빗줄기를 맞은 강의 표면에 파동이 연달아 일 듯 정처 없이 흔들렸다.
“오, 오르슈팡?”
아침훈련에 빠져서 몰래 농땡이를 치다가 그 자리에서 지휘관에게 딱 걸린 기병 같은 반응이었지만 오르슈팡은 그 마저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녀라면 어떤 이유에서든, 몇 번이나 훈련을 빠지든 눈 감아 줄 기세였다. -오르슈팡이 생각하기에-딱히 콩깍지는 아니었다. 애슐리라면 그렇게 빠지더라도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다른 사적인 시간을 할애해올 것임을 알았다. 이를테면 그녀를 향한 굳은 신뢰감이었다.
“어쩐지 요 며칠간 우리 기지에서 향긋한 꽃냄새가 난다고 생각했지. 역시 너였구나! 후후, 늘 고맙다. 재해 이후의 커르다스에서는 꽃이 정말 귀하니까 말이야.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준 거지? 역시 넌 마음이 따뜻-”
애슐리는 아직 얼떨떨한지 주춤했던 자세 그대로 서있었다. 표정도 아직 수습되지 않은 그대로이지만 이것이 사랑의 힘인지 다른 무엇인지 오르슈팡이 하는 말만은 빠짐없이 애슐리의 귀에 쏙쏙 잘도 들어왔다. 오르슈팡의 말을 듣던 애슐리의 표정은 점점 굳더니, 기어이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가고 말았다.. 오르슈팡은 아직 그런 애슐리를 눈치 채지 못한 듯 말을 길게 이어나가다 듣다 못한 애슐리에게 대화의 주도권을 강제로 빼앗겼다. 애슐리가 말을 자르고 들어온 것이다.
“우리가 아니야.”
“응?”
신나게 말을 하다 잘라버렸으니 기분 나빠하지는 않더라도 당황할 만도 한데 오르슈팡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도리어 말수가 적어서 늘 듣는 편에 속했던 애슐리가 먼저 입을 열었으니, 과연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걸까 하며 재밌는 이야기를 앞두고 있는 아이처럼 들떠 보이기까지 했다.
어휴. 애슐리는 그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제법 뾰족해진 눈매로 오르슈팡을 쳐다보는데, 미워하는 건 아니지만 뭔가 불만이 그득하여 심통이라도 난 얼굴이다. 오르슈팡은 저도 모르게 긴장하여 조용히 그녀의 이어질 말만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다음으로 내놓을 말은 꽤 신중해야 하는 건지 애슐리는 입을 세 번쯤 달싹이고 난 뒤에야 겨우 말을 내놓았다.
“당신을 위해서야.”
강한 돌직구가 용머리 전진기지 지휘관의 머리를 강타했다. 드래곤의 발길질에 머리를 쌔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강한 타격을 받은 오르슈팡은 순간 침묵했다. 에오르제아를 지킨 영웅이 축하연 이후 갑자기 울다하에서 반역자로 몰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더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고작 수초가 흘렀을 뿐이지만 오르슈팡은 많은 생각을 했다. 결국 처음 이해한 말이 맞다는 판단을 내리고 고개를 든 오르슈팡은 추위에 볼이 꽁꽁 얼었다가 막 녹기 시작한 듯 붉은 기가 감돌았다. 애슐리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그녀는 등을 보이고 있었다.
“애, 애슐리! 그 말은…….”
멍청한 말이지만, 그런 줄 알고서도 오르슈팡은 되물었다. 이보다 더 솔직하게 대답하려면 눈앞의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 입맞춤을 퍼붓어야 마땅했다. 마음이 같으니 괜찮을 것 같지만-사실 그녀라면 마음에 내키지 않을 경우에 자신을 밀어내거나 정강이를 걷어차거나 할 것 같으니 괜찮을 것 같지만-직구를 얻어맞은 자리가 아직 얼얼하여 머리가 빠릿하게 굴러가지를 않는 탓이었다.
애슐리는 일생일대의 위기에 봉착해있었다. 항상 마이페이스를 유지하는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얼굴에 열기가 감도는 것이, 거울을 보지는 않았지만 분명 제 삼자가 본다면 그녀의 감정을 읽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오르슈팡은 자신의 감정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의 그는 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 얼굴을 절대로 보일 수 없는 상대였다. 이 순간, 세상에서 그가 유일했다.
“애슐리님! 여기에 계시나용?”
애슐리의 수호신, 알디크가 그녀를 향해 구원의 손을 내뻗었다.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기 때문이다. 고개를 배꼼 내미는 라라펠족의 머리가 보였다. 이 기지에 분홍색 머리를 가진 사람은 지금으로써는 딱 한명 뿐이었다. 새벽의 혈맹의 타타루.
애슐리는 잽싸게 뒤돌아섰다. 오르슈팡은 자신을 빠르게 지나치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별안간 배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급히 등을 굽혔다. 타타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인 것에 비해, 애슐리는 뒤에서 무슨 요란이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왔다. 그렇게 다가온 애슐리는 냅다 타타루를 들어 허리에 끼고 걸음을 옮겼다.
“애, 애슐리이…….”
“앗, 두 분 이야기 중이시면 이따가 대화해도 괜찮은데용!”
“아니야. 네 말을 들어보고 싶어서 그래. 그것도 지금 당장.”
그 말은 지금 당장 이 자리를 뜨고 싶다는 말이렷다. 영문을 모르는 타타루는 애슐리를 한번, 그리고 오르슈팡을 한번 번갈아 쳐다보곤 고개를 한번 좌우로 갸웃거렸다. 낮게 신음하며 멀어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오르슈팡은 습격(?)받은 사람답지 않게 어쩐지 싱글벙글 했다. 물론 통증이 아직 다 가시지 않아 미간은 좁혀진 그대로여서 꽤 기묘한 표정이 되었지만. 아직 보는 사람은 없으니 어떠랴.
재해 이후의 커르다스는 꽁꽁 얼어붙어 도무지 옛날의 모습을 되찾을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오르슈팡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봄날의 햇볕이 문턱에 선 채 안으로 들어올까 말까 기웃거리고 있는 것을.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이 따뜻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