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라이트 / 베른하르트×라페×프리드리히
【ShadowLand】
용병이 몰고, 군인들이 베어 넘긴다. 통행을 방해하던 마물 떼는 그렇게 하나둘 스러졌다. 앞을 가로막는 훼방꾼은 없다. 나아가는 이는 인도하는 작은 인형과 세 전사들뿐.
“슬슬 기억이 돌아오는 모양인데. 안 그래, 베른하르트?”
“너도 느꼈나, 프리드리히. 그렇군…. 여전히 …너에 대한 기억은 흐리다만.”
베른하르트는 용병을 돌아보았다. 용병은 막 자리에 앉아 눈을 감은 인형을 들어 올리던 참이었다.
“그만큼 당신들에게 있어 나는 작은 존재였다는 거겠지.”
용병은 무던한 낯으로 말을 이었다.
“흔히 있는 일 아니겠어. 주고받는 감정의 크기가 다른 건 말이야.”
인형을 짐짝처럼 들어 올린 용병은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용병은 말이지, 그런 사사로운 일에 일일이 신경 쓰다간 이도 저도 못 돼. 지금 신경 써야 할 건 점점 귀찮아지는 마물이지, 내가 아니야.”
용병의 말에 프리드리히는 늘어지게 하품하는 시늉을 했다. 시시하다는 거군. 베른하르트는 헛웃음을 치면서도 반박하지 않았다. 그래, 아직은 칼잡이들을 애먹게 할 수준이 아니다. 칼잡이들에게 단숨에 썰려 나갔던 몽마 덩어리는 어느샌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방심하다 훅 간다는 거 몰라? 여유 부리는 것도 정도껏 해.”
용병은 인형을 든 자세가 불편했는지, 짐짝처럼 들쳐멘 자세로 바꾸었다. 제법 큰 흔들림이 있었음에도 인형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방심하다 큰코다쳤던 사람 같은 소리를 하는군.”
의뭉스럽다는 눈초리다. 베른하르트의 반응은 그다지 생경한 것이 아니었다. 용병은 길을 나아가는 내내 철두철미한 모습만 보였다. 무기 없는 맨손으로 마물의 목과 뼈를 부러뜨리면서도 방심만큼은 하지 않았다. 그래, 행동이 강박적일 만큼 예민했음을 안다. 용병은 쓰게 웃을 따름이었다.
“코만 다쳤겠어? 사지도 잘리고 모가지도 잘렸었는데.”
“질리지도 않네, 진짜….”
듣다 못한 프리드리히가 마른세수를 했다. 처음과 달리 날카로운 기색은 아니었다. 외려 유쾌함에 가까운 헛웃음을 짓고 있었다. 용병은 그 모습이 제법 기꺼웠는지, 한 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씩 웃는 낯을 만들었다.
"그만큼 조심하라는 의미지. 경계는 얼마나 해도 모자란다고."
"동의한다. 아직 우리에게 닿을 만큼 강하지 않더라도, 점점 강해지는 것은 사실이니."
"네, 네. 알겠어. 둘 다 깐깐하게 군다니까."
한숨을 폭 내쉰 프리드리히는 불평불만을 쏟는 대신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불만이 많아 보이는 걸음걸이에 용병은 웃음을 터뜨렸고, 베른하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프리드리히는 두 사람과의 거리를 벌렸기에, 용병은 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돌아가서 뭐 할래? 인형이 깨려면 열 몇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할 거야. 너희 애들이랑 포커라도 칠까? 마작도 좋고. 별게 다 있더만."
포커? 마작? 이미 꽤 먼 거리를 벌린 프리드리히가 서두르던 발을 멈추었다.
"인형뿐만이 아니라 우리도 과하게 움직였으니 조금 쉬어두는 게 좋을 거다. 포커나 마작 정도면 괜찮은 유흥거리겠군."
"그렇게 말해도 당신은 판에 안 낄 거잖아. 이봐! 포커나 마작이라도 한 판 하자고! 어때? 겜블러한테 말하면 다른 게 더 있을지도 몰라!"
이제 프리드리히는 고개까지 돌려 용병을 바라보고 있었다. 녹색 눈이 여름날의 푸른 잎사귀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디노는 뺄 건가?"
이쯤 되니 간절하게도 보였다. 용병은 유쾌하게 대꾸했다.
"그치가 낀 판은 재미가 없어. 몰래 해!"
"좋아! 그럼 마작으로! 무기 걸고 내기 어때?"
자고로 판에는 걸 게 있어야지! 프리드리히의 말에 베른하르트는 다시금 한숨을 내쉰다. 이전보다 조금 더 큰 숨이었다. 용병은 결국 폭소했다. 한숨에 섞인 아련함 탓이다. 형제의 해맑음을 지적하는데 이토록 아련할 필요가 있을까?
"무기 다음엔 옷이겠지? 다른 사람 벗은 몸 보는 취미는 없어. 기각!"
"그럼 인형 챙기는 당번을 거는 건 어때?"
용병은 짐짓 고민하는 시늉을 하며 두 사람의 낯을 살폈다. 프리드리히의 불만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고, 베른하르트도 당번 내기라면 괜찮지 않냐는 표정이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고민을 끝낸 사람인 양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좀 괜찮을지도."
"보나 마나 프리드리히가 오랫동안 당번이 되겠군."
"하, 혹시 모르지. 두 사람만 하게 될지. 두고 보라고."
세 사람은 치열한 일상 속 작은 여유에 웃을 수 있었다. 전투는 계속된다. 끝없는 여정 너머로 가기 위해서는, 보다 맑고 건강한 정신이 필요하다. 모든 날이 오늘만 같다면 좋으리라. 어느샌가 두 군인과 한 용병은 발을 맞추어 걷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