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플스토리 / 하얀마법사 × 미즈카
* 드림으로써 메이플스토리 공식 세계관과 설정, 타임라인이 다른 부분 존재함(미세한 차이일 뿐임)
* 초월자에 관한 오리지널 설정 주의(?)
* 캐릭터의 성별에 관련해서 궐녀厥女(그녀)/궐자厥者(그) 구분할 것 없이 전부 ‘그’ 하나로 호칭을 통일하기 때문에 드림주의 성별과 관계있는 호칭 아님 주의(?) 문체도 본편의 문투 문제이긴 하지만 厥女 나 厥者 나 쓰기 싫어해서 그럼
* 커플명은 하마미즈지만 하얀 마법사 본명이나 이름 없음에 열불 나서 본편 내내 두 사람 다 이름 언급 없음 주의(?) 라고 해봤자 이름 따위는 중요하지 않는다. 알게 뭐냐. 네임리스 드림 해도 상관없기는 하지만
* 그래도 드림주까지 이름 없는 네임리스는 아니란 소리
* 본명(네임)리스 커플은 싫어 무조건 이름 있어야 함 그래서 하얀 마법사도 이름 설정해둔 게 있고 본편 내내 하마미즈가 서로 이름 없이 저기, 야, 너, 얘, 아이, 아이야, 이렇게 부르는 게 아니라 서로 이름을 부르긴 하는데, 하지만 알 바냐 이름 언급 없음이다
Red Tiger Eye (Act 2)
운명을 부숴버리고,
운명에서 도망치고,
운명을 새로이 개척해나가고,
운명이란 힘을 거부하는 존재.
그는 당연히 그럴 자격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초월자라는 운명에서 도망친 것에 대해서도 다시는 간섭하지 않았다. 거부하고, 부숴버리고, 도망쳐도, ……그는 그래도 되니까.
몇 번이고 죽은 뒤 다른 존재로도 몇 번이고 부활하면서도, 그는 제대로 된 이 세계의 일원이 아니기에 그 운명을 스스로가 짜 맞출 수 있는 세계의 일부. ……어쩌면 그 운명에는 간섭할 수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그가 아닌 새로운 빛의 초월자. 이 세계의 일원이되, 자신의 운명을 새로이 써나가는 그의 운명에 섞여 들은 그 아이는, 손을 쓰기도 전에 속박에서 벗어나 세계의 일부가 아니게 되어버렸다.
몇 번이고 눈을 깜박이며 멍하니 두 손만 바라보고 있는 상태로 얼마나 있었을까.
어느샌가 갑자기 이상하게 몸이 가벼워진 묘한 기분이 들어 손을 들어 가슴께, 라고 할 수 있는 부분까지 들어 올렸을 때부터 줄곧 여전히 이 상태.
분명 자신은 그것이 정해둔 운명을 거부하겠다고 했을 때부터 퇴색되어 바스러지고, 인간이라는 형태가 제대로 남지 않은 몸으로 익숙해지고도 남을 정도로 오랫동안 지내왔었다. 그리고 ‘초월자’인 자신의 운명을 부숴버리거나 죽음이란 축복의 안식을 안겨줄 수 있는 대적자들을 모아 마지막 전쟁이 될 수 있는 이 싸움을 앞두고 있기까지 했는데.
“검은 마법사! ……아?”
마지막 싸움이 될 수 있는 상황을 앞두고 있는데.
“……저게, 검은 마법사야?”
마지막 싸움을 앞두고 있었는데.
“아니, 검은 마법사라고 하기보단…….”
“저건, 하얀 마법사에 더 가깝지 않아? 차원의 도서관에서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았는데…….”
“어, 당신도 봤었어요?”
“……우리 모험가들이야 얽매여 있는 제약 같은 게 없다 보니 남아도는 게 시간이라고 뭐든 해볼 수 있었다고는 해도… 윈드브레이커 님은 시그너스 기사단이었지 않았어요? 사실 메카닉 님도 레지스탕스라 할 일이 좀… 많았을 텐데…….”
‘거 진짜, 말 참 많다…….’
“그 도서관장이라는 원숭이… 탈레스가 하도 불러대고……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짜증 나게 부르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없는 시간 내서 보러 갔었던 거라고요……. 저희는 진짜 시간이 막 남아돌아서 그랬던 것도 아닌데…….”
‘……갑자기 분위기 친목회?’
“하긴 안 가면 갈 때까지 계속 부르긴 하더라고요.”
“그것 때문에 광렙업 하다가 승질 나서……”
‘……이젠 아예 무시하는 건가?’
“그으-렇기는 한데, 당신은 아직 시티즌 명칭 달고 있지 않아? 레지스탕스에서도 직업 고른 거 없이 그냥 레벨 올리고 그랬다며?”
“시티즌인 내가 할 말은 진짜 아니라곤 해도, 정말 당신이 할 말도 아닌데요? 어디서 아직도 노블레스 명칭이기만 할 뿐인 사람이 왜 그래?”
“그래, 진짜 내가 할 소리도 아니긴 한데 시티즌이랑 노블레스가 할 말은 또 아니죠. 몇십 년 동안이나 초보자이기만 한 내가 있는데.”
“아, 시끄러워요. 진짜. 지금 상황에서 그런 게 중요하답디까?”
……그래, 시끄럽다.
사슬을 움직이기 위해 습관적으로 팔이라 할 수 있었던 것을 휘두르려고 했다가 힘이 잘 들어가지도 않는, 무겁게 축축 늘어지는 듯한 ‘진짜’ 팔이 저릿저릿해지는 감각에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통증이란 느낌을 느낄 수 있었다. 아파.
마나를 이용해 사슬을 쓰기 위해서 팔을 움직이려던 순간부터 찾아온 통증과 함께 중력이 무겁게 느껴지는 기분에 축축 늘어지려는 무거운 몸을 꼿꼿이 세우려 노력했다. 티가 날 정도로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여기서 쓰러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텔레포트라도 써서 어딘가로 도망가고 싶었다.
마나를 움직여 마법을 써보려 했지만, 몸에 남아있는 마나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어서 공기 중에도 가볍게 흘러 다니는 마나를 끌어모으려 했다.
“헐……? 야, 쟤 왜 갑자기 피 토한대!?”
“알게 뭐에요! ……인데, 완전히 살아있는 시체 꼴 아냐, 저거? 눈에서까지도 피눈물 흐르는데, 쟤 저렇게 놔둬도 돼요?”
“아 증말, 그렇게 잡담할 시간 있으면 그냥 파엘이나 갖다 줘도 될 텐데, 뭘 그렇게 노닥거려요?”
“……그런데, 그래도… 그래도 아까까지는 검은 마법사였긴 했잖아. 그래도 돼? 조금 전까지는 적이었던 애를, 지금 좀 아파 보인다고 치료해주는 게 말이 되나?”
“지금 그런 거 따질 때요? 그리고 말은 똑바로 합시다! 아무리 동일 인물이 맞는다고 한들 조금 전까지의 모습이랑 지금 저 모습이 똑같은 모습이랍디까? 하얀 마법사는 그래도 인간이잖아! 게다가 저게 어디가 좀 아파 보이는 겁니까! 아주 이목구비 전체에서 다 나온 피에 젖은 모습이 조금 아파 보이는 겁니까?”
……시끄럽다.
내장이 다 파괴된 것 같은 느낌에 온몸의 뼛조각이 잘게 부서져 가는 것 같은 기분은 정말이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러워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라 힘없이 바닥에 추락하는 몸이 바닥에 부딪힌 것도 아프다는 감각을 느끼지 못한 것 같다.
생명력이 줄어가는 기분에 진짜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흐릿해진 눈앞에 하늘하늘한 머리카락이 팔락거리는 모습을 본 것 같아, 문득 어렸을 때의 그 사람이 떠올랐다. 기억이 싹 날아가서 백지상태로 처음 마주쳤던 그때, 그 사람의 이름을 들었을 때, 같이 지내게 되었을 때, ……오랫동안 그의 보호 안에서 자라던 때. ……그리고 그가 죽은 모습을 봤을 때까지.
그 사람도 죽기 전에 이렇게 아픈 걸 느끼면서, 아프게 죽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많이 아파?”
아파. 너무 죽을 것처럼 아파서, 머리가 멍해. 아파요.
누군가 뭐라고 한 것 같은 소리가 가까이서 들렸고, 고개를 끄덕였는지 대답을 했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다. 손을 감싸 쥐고 있는 누군가의 서늘한 손이 잡히는 걸 끝까지 놓지 않으려 잡고 있을 뿐.
“좀 쉬고 있어.”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거야’라는 말을 들은 것 같아. 눈을 감으면서 온몸이 시원해지며 편해지는 기분에 그대로 정신을 놓아버린 것 같았다.
❋ ❋ ❋
“좀 잘래?”
“……아니.”
“이렇게 잠이 덕지덕지 붙은 피곤한 얼굴로 무슨 소리야. 좀 자둬. 목소리도 졸음에 다 잠겨서 말이야.”
“싫어……. 자면, 꿈꿔서… 자기 싫어요.”
칭얼거리는 듯한 말에 달래주듯이 그의 하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만져주자 눈을 감고 기대듯이 안겨 왔다. 진짜 애였을 모습이던 때보다 더 어리광이 많아진 그의 모습은 분명 예쁘장하긴 해도 선이 굵어진 어른의 모습인데, 다 큰 청년의 모습인 그가 멋있기보다 더 귀여워 보이는 이유는 뭘까. 물론 어리광 때문에 그럴 수 있기는 하지만, 보통 성인 남성이 아무리 어리광을 부리던 귀여운 짓을 한다고 해도 귀여워 보이긴 힘든데.
“……귀여워.”
“귀여운 거 아닌데… 뭘 보고 귀엽다는 거야.”
“너 말이야. 하는 짓이 다 귀엽잖아. 어리광도 그렇고.”
“귀엽게 보라고 어리광부리는 거 아닌데…….”
“응, 귀여워.”
“……귀엽게 보이려고 이러는 거 아니라니까요.”
“그래서 손을 슬금슬금 올리려는 거야?”
“말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게 하는 건 참 잘해서……. 귀엽다고 애 취급은 하지 말아요.”
“그래, 알았어. 그래도 지금 그렇게 졸리면 자 둬. 재워줄게.”
재워준다고 하는 말에 눈썹을 꿈틀거리다가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을 풀어 여전히 머리를 토닥여주고 있는 손을 잡고 끌어내려 깍지까지 끼는 모습은 귀엽게 안 봐주려고 해도…….
“자는 동안 계속 옆에 같이 있어 줄게.”
“…….”
“일어날 때까지 손잡고 있어 줄 테니까, 응? 그러면 되겠어?”
“……같이 자.”
‘마지막으로 같이 자 줬을 때처럼, 같이,’ 라고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입을 꾹 다물었다. 속이 따끔따끔하게 바늘에 찔린 기분이 들었다.
아직도 그걸 기억하고 있어서, 서러워서 계속 옆에 껌딱지처럼 찰싹 붙어 있으려고 그러는 건지.
어쩌면 그가 아이의 눈앞에서 죽은 모습을 보여줬을 때는, 아이가 더는 아이가 아니었다고 한들 그의 정신세계만큼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아이인 그대로의 것이라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던 것이었을까.
“……같이 자자. 어디서 잘까?”
“네 방.”
❋ ❋ ❋
그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몇 달이 지난 뒤였다고 들었다. 시간의 신전에서부터 리프레로 벗어나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을 작은 여관에 그를 데려다 놓은 사람이 있다고 했지만, 그는 그 사람의 모습을 여태 볼 수가 없었다.
그전에도 몇 번 눈을 뜬 적은 있었다지만, 정말 말 그대로 가까스로 눈만 뜰 수 있었던 상태였었기 때문에 연합은 그를 가까이 두고 감시, 혹은 상태를 살펴보고 싶었어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그랬기 때문에, 제가 혼자 남아서 당신을 지켜보고 있었던 거라고 몇 번을 말합니까. ……그 사람은,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었고…….”
“……때가 아니다?”
“그것에 대해선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생전 처음 본, 연합과도 전혀 관계없다는 사람이라던데.”
“그런가. ……민폐만 많이 끼치는 존재나 다름없군. 미안하다.”
그의 말에 검붉은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는 인상을 쓰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튼실하게 잘 날아다닐 수 있는 날개였지만, 역시 오래전 갈라지고 너덜너덜하게 헤진 마족의 특징인 날개가 뻐근해져 오는 것 같았다.
검은 마법사. 아주 오래전, 그를 나름 오랜 시간 동안 주군으로 섬겼었던 기억과 배신당했다는 흔적과 판단으로 인해 그 주군을 자신의 손으로 처치하려고 했던 기억, 그리고 그때 입었던 상처는 가끔 꿈을 꿀 때마다 몇 번이고 환상통을 불러일으켰다. 꼭 꿈으로 꾸는 것이 아닌,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환상통이 도지기도 한다.
“그게, 그걸… 그런…… 그 모든 걸 전부 그 말 하나로…….”
“그럴 수는 없지. ……없겠지. 그 누구도, 용서조차도 할 수 없겠지.”
“그러면 왜……”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는 남자를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가 숨을 고른 뒤 말을 꺼내려 했다.
“오랜만이야.”
등 뒤에서부터 어깨를 가볍게 어루만지듯이 감싸는 손이 느껴지는 동시에 들린 목소리에 그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처음 듣는 목소리지만, 어쩐지 묘하게 예전부터 들은 적이 있었던 것 같다는 이상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그럴 리가.
그래선 안 되는 것일 텐데.
“아…… 당신, 분명… 검은, 아니, 하얀 마법사를 운반했던…….”
“으음……. 응. 역시 네가 감시자 역할처럼 있었구나.”
“가, 감시자… 라고 하기엔…….”
“쌤쌤으로 쳐. 얘도 이제는 검은 마법사라던가, 하얀 마법사라던가… 더는 마법사도 아닌 녀석이니까. 어떤 쪽으로도 평범한 사람마저 아니게 된 녀석이라서 말이지.”
그를 지칭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떨리는 것인지 날개를 움찔거리던 남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에게 다시 시선을 주었다. 여전히 침대에서 눈을 뜨고 일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같은 자세로 있었던 모습 그대로, 표정을 짓는 얼굴 근육만을 제외하고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은 모습은 어쩐지 그렇게 만들어진 사람 모양의 큰 인형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말이지, 사람과 다름없는 모습인데도 그걸 보고 운반이라니 너도 참…….”
“……제가 뭐라고 하던 당신과는 별로 상관없지 않습니까.”
“아, 하하, 하. 너무 아무런 상관없는 제삼자 취급하지는 말아줘~ 정말 그런 제삼자만은 아닌걸. 그도 그렇지만…… 오랜만에 다시 만났는데, 너는 정말로 날 볼 생각도 없는 거니?”
그 말에 다시 눈썹을 꿈틀거리며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모습에, 그와 함께 날개까지 파득거리며 움찔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으로 보인 반응들은 어쩐지 재미있는 것 같다.
“……말도, 안, 돼.”
“뭐가? 말이 안 되는 게 뭔데?”
턱까지 조금씩 잘게 떨던 그는 한참의 시간을 들여 말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당신이 어떻게…… 이렇게, 살아 돌아올 리는…….”
“아핫.”
정말 우스운 소리를 들어서 재미있다는 듯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 것처럼 짧고 가볍게, 그리고 그의 반응을 이해하겠다는 뉘앙스의 감탄사처럼 웃음을 짓던 그는 대답 같은 말을 이었다.
“하긴, 보통 모험가들의 죽음과 부활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고, 다른 부활이라서 더 그렇겠지? 그래서 더 말도 안 되는 부활 같다는 거고?”
“그건 누구나…… 누가 봐도 당연한, 이상한 모습이잖아. 모험가들은, 아니, 모험가뿐만이 아니더라도 죽음과 부활은 선택형이니까… 수명이 다해서 죽은 경우나, 수명의 끝이 아니지만 죽게 된 경우라도 그렇게 죽어야 하는 운명을 가진 존재들은 정말 그걸로 끝인데……. 그 운명이 아니거나, 수명의 끝이 아닌 이상은 누구라도 죽음에서 돌아와 원래의 모습으로, 원래 몸으로 부활할 수 있잖아. 그런데, 당신은…….”
말을 하다가 결국 얼굴을 있는 대로 한껏 일그러뜨리던 그는 윗니로 입술을 꽉 깨물며 입을 다물어버렸다.
눈까지 꾹 감아버리며 괴로운 것처럼 얼굴을 펴지 못하고 어깨를 움찔거리며 잘게 떠는 모습은 잘 이해가 안 갈지언정 누가 봐도 괴로운 모습이라고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의 하얀 머리카락에 손을 뻗어 조심스레 쓰다듬듯이 만져주기 시작한 그 사람의 말은 두 남자를 혼란 속에 제대로 빠트렸다.
“그야, 나는 여기 차원의 신이나 오버시어 같은 존재가 아닌, 엄연히 완전히 다른 존재의 신 등이 있는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출신이라 더욱 죽음과 부활의 개념이 다른 것이 당연할지도 몰라. 물론 알테이아 대륙에 있었을 때도 이러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지금 여기 차원에서의 ‘나’란 존재란 아직도 이곳의 일원으로 흡수된 존재가 아닌 불순물인 것 같으니 그럴지도. 수명이 다해서 죽었을 때도, 영혼으로 남는 경우도 전혀 없었으니…….”
수명이 다해서 죽었을 때도 있었고, 여럿 죽어봤다는 듯한 말에서도 영혼이 남은 적은 없었다는 말에 반 마(半魔)는 얼굴을 빳빳하게 굳혔다.
자신의 동생인 데미안, 그 아이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게 되는 끔찍한 일을 두 번이나 겪었음에도 그리도 큰 트라우마를 겨우내 떨칠 수 있었던 이유는 영혼으로나마 다시 만나 격려를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껏 미치지도 않고 아슬아슬하게도 멀쩡히 지낼 수 있었던 것인데. 영혼조차도 남지 않고 다른 이로 부활한다고?
“어떤 이유에서든 간에 죽음과 부활을 선택할 수도 없었으니까, 죽으면 정말 그걸로 끝. 환생과는 다르지만, 비슷하게 다른 몸으로 갈아타서 살아가고 있는 거야. 지금 뒤집어쓰고 있는 겉껍데기가 달라서 널 주워주고 키워줬던 그 사람과는 다르다고, 타인 취급하겠다면야…… 네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을 수밖에.”
그 말에 그는 계속 미동도 없이 어깨만 잘게 떨고 있던 몸을 홱 돌렸다. 고개를 돌리며 몸을 함께 움직여서 풍성하고 긴 하얀 머리카락이 허공에 펄럭이며 휘날리자, 찰랑거리며 등 뒤로 가라앉는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사이에 몇 가닥씩 흘려보냈다.
“역시 길게 기른 머리카락이 정말 여전히도 예쁘게 잘 어울리는구나.”라고 중얼거리듯이 입안으로 말을 우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뒤로 돌아선 그는 그제야 마주하게 된 그 사람을 제대로 눈에 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당신은 틀렸어.’
어렸을 때부터 수년간 같이 지내며 봐왔던 그 모습과 거의 그대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한 사람을, 어떻게─
“어떻게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그런 모습이라는 겁니까. 대체 뭐가, 뒤집어쓴 겉껍데기가 다르단 소리야.”
대체 어딜 봐서.
오히려 그 사람이 죽었을 당시의 모습에 가까운, 그리도 닮은 사람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기 때문일까. 그는 눈가가 시큰시큰해지며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별로 울고 싶은 생각이나 마음은 없었지만, 울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별로 없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울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우니?”
어쩐지 조금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미안하다는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손을 뻗어 눈가를 쓸어주는 그 사람의 모습에, 눈물이 나올 것 같다는 기분뿐이던 것이 기분뿐만이 아니게 되었다. 그것이 물을 트는 수도꼭지를 돌린 것처럼 그 말을 듣자마자 울음이 터져 나와, 눈물 때문에 시야가 뿌옇게 흐릿해지며 눈을 뜨고 있기에는 아파서 눈꺼풀을 닫았고 손을 뻗었다.
눈을 감고 있어서 보이지 않아 안 보고 있는 사이에 또 갑자기 사라져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가지 말라고 붙잡고 싶은 것 같았다.
손을 뻗어 앞에 있는 사람을 잡으려고 하자 그의 작은 어깨가 손 안에 가볍게 들어와 잡혔고, 그 어깨가 조금 움직여 팔을 자신에게 뻗어오는 것을 느꼈다.
“조금 곤란하네, ……이렇게 울 거라고는 전혀 생각진 못했는데.”
“내가 어떻게 안 울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겁니까! 날 그렇게… 그렇게…… 혼자 놔두고……. 그렇게 내버려 두고…… 그렇게 죽었으면서… 그렇게 갔으면서……!”
“혼자, 혼자 놔뒀던 건 아니잖아. 그래서 그분께 남아달라고 부탁해서 널 돌봐줄 수 있게 해주려고 했었는데…….”
“남아있기만 했었지……! 그 인간은, 그건…… 그 인간은 당신이 아니잖습니까. 당신만큼 나한테 뭘 해준 것도 없었는데…….”
눈물을 퐁퐁 쏟아내며 여태껏 쌓인 게 많았다는 듯이 말을 주절주절 토해내는 모습에 ‘아주 서러웠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그가 약속을 언급한 적은 없었어?”
“무슨, 약속……”
“……너한테 아무 말도 전혀 하지 않았니?”
“……‘한 사람의 몫을 해내는 것뿐만이 아닌, 평범한 ‘사람’만은 아니기에 ‘사람’이 아닌 존재로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순응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말 밖에는. 한시 빨리 한 사람의 몫을 해내는 것만이라도 어떻게든 노력해서, 넘어서야 한다고 재촉만 했습니다. 그게, ……그것이 당신이 저에게 남기고 싶었던 말이었습니까? 그 말밖에?”
그는 여전히 아이가 아니었지만, 아이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은 어째서일까.
저에게 울면서, 붙잡고 매달리면서 서러움을 토해내는 모습이 여전히 어리광부리고 싶어 하는 아이 같은 모습 때문인 걸까.
“그분이 그럴 줄은 몰랐는데……. 아주 교묘하게 약속을 피해 가면서, 그걸 말해주겠다는 약속마저도 절반쯤밖에 이행하질 않으셨던 거야. 그 점에 대해서는… 미안하다고 해야겠구나.”
“됐어요. 이제 와서 사과는 무슨 사과를 하는 겁니까? ……난 그런 소리를 듣고 싶었던 것도 아닌데, 그런 게 아닌데…….”
어리광, 에 가까운 짓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딱히 어리광을 부리려고 했던 건 아니라며 퉁명스레 투정이 묻어나는 모습을 갈무리하려 했다.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서러워하면서 뭘 미안해하지 말라는 거니? 입이 댓 발로 쭉 튀어나왔으면서. 어렸을 때도 안 그랬던 게, 이제야 어리광이라도 좀 부리고 싶은 거야?”
“어리광, 아니… 야…….”
“이렇게 귀여워서 말이야.”
“귀여운 거 아닙니다!”
“지금 이런 모습의 널 보고 누가 안 귀엽다고 할까.”
“귀여움받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라고요!”
“그래그래, 안 귀여운 거야.”
“누가 봐도 귀여워하는 거잖아요! 내가 이러려고 살아있는 것도 아닌데…… 무슨…….”
그 말에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의 머리를 꼭 안아주듯이 끌어안고 뒷머리를 토닥이던 손을 멈췄다.
“저기, 지금 살아있는 것 자체를 왜 살아있는지 모르겠다는 소리를 하는 건…… 아니겠지?”
갑자기 훈훈하고 귀여워 죽겠다는 내 새끼 귀여워 어화둥둥 하는 것 같던 기운이 싹 갈무리되고 싸늘한 눈빛과 말투로 느껴지는 분위기는 너무 서늘해져서 여태껏 할 말도 잃고 넋을 놓고 바라보던 반 마까지 움찔거리며 불안함을 느낄 정도였다. 이대로 저에게까지 불똥이 튀지는 않을까, 불똥이 튀면 어떡하지, 싶은 생각을 하면서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를 보는 듯한 모습에 손을 휘휘 내저었다.
‘좀 잠시만이라도 비켜주지 않으련?’ 같은 텔레파시가 통하는 것 같은 기분에 조심스레 자리를 피한 모습을 보고 다시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원래라면, 그가 정해둔 운명은 아니어도, 너는 그때 네가 모이게 만든 연합과 대적자에 의해 소멸했어야 했지. ……네가 죽으려고 하는 그런 모습을 차마 두고 볼 수는 없어서 오버시어에게 묶여버리게 된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끈을 잘라버리는 것 정도만 해 주었을 뿐이고.”
“……그게 무슨, 소리─”
“지금 살아있는 것 자체는 내가 살려줬다, 는 말이잖니? 오버시어의 속박에서 벗어난 초월자가 아닌 삶을 살 수 있으면서, 두 번 다시는 그의 속박에 잡혀 들지 못할, 평범한 사람처럼 살 수 있게 그 사슬만을 잘라내 주었을 뿐이라고.”
그새 그렇게도 끝없이 나올 것 같던 눈물은 어느새 멈췄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숨이 막히는 분위기와 저에게 들려주는 말의 내용 때문에 불안하게 눈동자만 세차게 흔들렸다. 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동시에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가는 마음 때문에 억지로 모르는 척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게, 그게 가능했던 거라면… 그럴 수 있었더라면…… 왜 그때는…….”
“너도 알고 있었잖니?”
초월자는 절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없었다. 오버시어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그것이 만들어둔 운명의 굴레에 갇혀 자신이 생각하는 것조차, 자신의 마음조차 매번 의심해봐야 할 정도로 자신의 의지와 생각이 정말 자기 자신의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초월자는.
스스로 초월자라는 존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
“너도 그걸 알았기 때문에, 벗어나고 싶어서 그리도 발버둥 치면서 연합이라는 세력이 만들어지고 너에게 대항할 대적자가 생길 정도로 활동했었잖아.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고.”
❋ ❋ ❋
먼 곳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가 잠을 깨웠다. 힘겹게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겨우 뜬 눈으로 멍하게 천장만 바라보았고, 이곳이 몇 달 전부터 쓰던 방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밖의 소음은 조금도 진정되지 않았다. 대체 뭐 때문에.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옆에 같이 누워서 함께 잠들었던 그 사람조차도 보이지 않아 괜히 기분이 안 좋아져 한껏 구겨진 얼굴로 무거운 몸을 일으켜 문까지 짜증스럽게 터벅터벅 걸어갔다.
“아, 저기!”
“괜히 말 걸지 말아요. 당신에게 허락된 대화 상대는 나 하나뿐이니까.”
“하지만……!”
“저 애에 대한 이야기라도, 대화는 저와 하는 거예요.”
누가 봐도 찬바람이 쌩쌩 이는 싸늘한 태도와 불쾌하다는 기색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면서도 절대로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은 허용 못 하겠다며 어떻게든 상대하려는 그 사람의 모습에 저도 따라서 기분이 더욱 불쾌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은월, 이었던가.
그 사람의 앞에서 뭐라고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 모습은 딱히 그에게 별다른 감정은 없었어도 기분 나쁘다는 기색을 내보이며 그를 대하는 태도인 그 사람의 모습 때문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유감이 있다거나, 별달리 신경 쓰지도 않았던 존재였는데.
아직도, 오랫동안 잘 불러보지 않았던 호칭이라 어색하고 불편하기는 했지만, 한참을 머뭇거리다가도 결국 입을 열었다.
“……누나. 왜─”
─내 곁에 없었냐는 투정 같은 말이라도, 뭐라고 말을 해서 주의를 돌려주고 싶었던 것이었는데 그 사람에게는 이미 자신이 내뱉은 호칭 하나만으로도 주의가 돌려지기에는 충분했던 것 같았다.
“응, 그래.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힘든 모습으로 밖에 나온 건데, 응? 피곤하지는 않아? 몸은 괜찮고? 꿈은, 안 꿨니?”
꿈, 에 대해서 말이 나오자 이번엔 이쪽이 마음이 불편해질 차례였다.
한동안 말이 없어서 그런지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모습은 기쁘다는 얼굴과 걱정 가득한 표정에서 미안하다는, 안쓰러워하는 모습으로 변해갔다. 괜히 또 걱정을 시키게 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 같아 급하게 말을 꺼내며 수습하려 했다.
“……괜찮, 아. 별달리, 안 좋은 꿈은… 아니에요.”
“하지만 왜…… 그렇게 안 좋아 보이는데 어떻게 괜찮다는 말을 그대로 듣고 믿을 수가 있니?”
“너무 그렇게 아이 취급은 하지 말라니까…….”
“이 와중에도 아이 취급이라고 받아들이는 거니? 그렇게 걱정되는데, 아이 취급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걸.”
“말투가 너무 애 달래는 그런 느낌이니까. 걱정한다고 해도, 그렇게 안 할 수 있지 않아요?”
“그건 그렇지만…… 아무래도 어렸을 때도 ‘누나’라는 호칭이나, 존댓말이나… 별로 안 하던 걸 다 하니까 괜히 또 대견한 아이 보는 기분이니까 말이지. 그래, 아마 그래서 더 그런 걸지도~ 사실 어리광도 진짜 어렸을 때보다 더 늘어나기까지 했으니까 말이야.”
“……그러면, 그냥 마음대로 해요.”
입술을 삐죽거리듯이 조금 우물거리다가 고개를 푹 숙여 그 사람의 어깨에 기대듯이 턱을 누르며 말을 끊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들어 올려진 손이 그의 하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다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그 자리에 서서 자신들의 모습을 이상하다는 듯이 미묘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은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시선을 다른 곳에 두며 조금 당황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 그를 향해 다시금 날이 선 목소리로 축객령을 내려서 일지,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을 힐끔힐끔 쳐다보면서도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 ❋
그의 몸 상태가 많이 좋아지자 여태껏 제대로 움직일 수 없어 계속 반 마의 도움을 받으며 그 집에 머무르는 동안 가끔 찾아오던 연합의 사람들은 더욱 자주 찾아왔고, 제대로 움직일 수 있기라도 하다면 금방이라도 자신들의 눈이 잘 닿을 수 있는 주변에 두고 감시하고 싶어 하는 듯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물론 자신마저 점점 인내심이 짧아졌다. 물론 그런 행태를 옆에서 같이 보게 된 반 마까지 마찬가지로 그들을 향한 감정이 좋지는 않았기 때문에, 레지스탕스의 페르디는 조심하겠다고 사람을 보내는 일을 줄였다지만…… 그들을 보고 대화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일까.
자신보다도 더 감정 소모를 하며 스트레스받는 그 사람의 모습 때문에 결국 그가 먼저 제안을 했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자. 평온의 숲에 있는 우리 집으로 가요. 그곳이라면 사람들이 찾아오기는 힘들 거야.”
“……괜찮겠니?”
그가 먼저 이런 제안을 할 거라 생각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 말만 내뱉고 별다른 말은 하지 않은 채 마음 쓰는 모습이 너무 확연히 다 보여서, 괜찮지 않다고 해야 할지 고민까지 들었다.
“당신한테는, ……죽는다는 죽음의 무게가 평범한 일반인들과 많이 다르니까요. 다를 테니까, 나를 배려해서 그렇게 마음 써주는 것이 고마운걸요. 그렇지만 그것 가지고 당신이 괜히 일부러 무거운, 불편한 마음이지 않았으면 좋겠으니까. 괜히, ……괜히 마음 쓰지 마.”
“괜찮을 거야.”라는 말을 뱉기가 어려웠지만, 그래도 한참의 시간을 들여서 마음을 정리하며 힘들게 말을 뱉자 어쩐지 말 그대로 괜찮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언어에, 말에 힘이 있다는 말이 이런 것일까.
말로 뱉고 나니까 이전보다는 그렇게까지 마음이 불편하거나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덜해졌다.
‘과연 그 사람이 죽었던 모습을 본 그곳에서, 다시 지내면서 그 죽음을 떠올리며 괴로워하던 것을, 기억을 새롭게 덮어쓰고 다시 잘 지낼 수 있을까.’ 같은 생각도 들었지만, 정말 확신이 전혀 들지 않았던 이전보다는 그나마 나아져서. 아직도 확실하게 괜찮을 거란 확신은 들지 않아도,
“아. 저것들 또 왔네, 진짜. 귀찮아 죽겠는데.”
“……그래도 레지스탕스 사람은, 오랜만에 오는 것이죠. 여태껏 왔던 분들은 영웅들 쪽에서나, 시그너스 기사단 쪽의 사람들이었으니…….”
“그걸 내가 몰라서 이러는 줄 아니?”
“그건 아니지만…….”
지금 이런 식으로 현재의 귀찮음과 성가심, 혹은 육체적으로나 심리적, 정신적으로 불편함을 겪는 일이 좋은 일은 아니라서.
‘과연 평온의 숲으로 피해서 숨어 살 듯이 지내며 잘 지낼 수 있을까.’ 같은 심리적 요소에 대한 것 때문이라도, 이보다 더 귀찮고 불편한 일을 더 겪게 될 것 같은 미래의 일을 생각해보면 마음만 조금 불편한 선에서 끝날지 몰라도 차라리 많은 사람의 관심과 주목을 받으며 일상생활이 불편할 정도의 삶을 살게 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괜찮아야 했다.
일반적으로는 소량의 마나만 있다고 한들, 모험가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라도 흔히 있다는 마나조차도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정말 평범한 사람조차도 아니게 되었으면서 평범한 ‘사람’이 되어버린 그는 이제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 흔하디흔한 모험가도, 마법사도, 사람들을 도와준 꼴이 되었던 때의 구원자라는 것도, 빛을 연구하던 오로라의 초대 마스터였던 그런 직책마저도, 다시 돌아가는 것조차 불가능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밑바닥의 존재.
하물며 길가의 돌멩이나 식물에조차도 마나가 깃드는데.
누군가가 반려견, 반려묘로 함께 지내는 애완동물 정도의 강아지나 고양이보다도, 길가의 돌멩이보다도 못한 채 살아있기만 할 수 있다는 건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마나가 없는 경우의 존재들도 있다고 하지만, 그들은 마나가 없는 대신 생명력과 체력이 없는 마나를 대신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거나 강한 경우.
힘법사도 아니었던 그는 생명력은 몰라도 체력조차도 기본밖에 되지 못하던 비실비실한 마법사였기 때문에 ‘검은 마법사’로서 초월자가 되었을 때와는 달리, 마나조차도 없는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몸을 아무리 회복한다고 해도, 남들은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상생활을 하는 것조차도 힘들게 버티며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갈 수만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런 악조건에서 몸이 회복되는 속도도 느렸기 때문에 오랫동안 연합의 사람들로부터 그리도 많이 시달렸는데, 그들을 피해 숨지 않고 근처에서 일거수일투족 감시까지 당하며 더 귀찮아질 것이 뻔한 앞일을 알면서 그대로 지낸다?
진짜 얼마 없는 피조차도 다 말려서 자살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그 누구라도 그런 선택은 피할 게 분명하다. 당연히.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은 그의 모습에 오랜만에 레지스탕스에서부터 온 페르디 교장은 안쓰러운 기색과 미안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우리 레지스탕스는 이만 손을 떼기로 했습니다. 레지스탕스가 아닌 개인적인, ……개개인의 사람으로서는 어찌 구속하거나 명령할 수는 없겠지만, 그 누구도 그럴 자격이 있지는 않으니 말이오.”
부디 그 점에 대해서는 유념해 달라는 말로 대화를 짧게 끝낸 페르디는 다시 돌아갔다. 더는 중간에 끼인 처지가 아니게 될 수 있다지만, 아직도 마음이 쓰이는 탓인지 중간에 낀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반 마에게 있어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차피 ‘검은 마법사’였을 때부터 그렇게 주변에 신경 쓰고, 배려하거나 그럴 일은 그만둔 거나 다름없었을 텐데.”
‘우리 아가가 어느새 또 성장해서 마음 고쳐먹고 좋은 사람이 된 건가~?’라는 것 같은 모습에 정말 여러모로 마음이 불편한 일들뿐인 현재가 정말이지 견디기 힘들었다. 응. 역시 평온의 숲에 박혀서 단둘이서만 집에서 지내는 게 제일 나은 일이겠지.
❋ ❋ ❋
허공으로 떠오르는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한번 깜빡이자 눈꺼풀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에 이곳이 엘리니아라는 것이 생각났다. 다시 한번 눈을 깜빡이자 엘리니아에 있는 루미너스와 라니아라는 소녀가 산다는 두 사람의 집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그렇게 소녀의 초대에 의해 그 사람의 손에 이끌려 평온의 숲에서부터 나와 그 집에 찾아온 것도, 아직은 얼굴 보기 껄끄러운 루미너스와 얼굴을 마주하면서도 결국 넷이서 같이 앉아 차를 마셨던 것이, 그들을 오랫동안 바라보기만 했던 것도, 졸음이 몰려왔던 것도 하나하나 떠올랐다.
그러다 정말로 잠들었구나.
어이가 없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허탈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모든 일이 전부 끝났다고 할 수 있을 그 날 이후로 고작 몇 번 만나지도 않았던 어색한 사람들에 밝은 빛이 잘도 드는 낯선 장소, 그 모든 것이 전부 어색한 게 당연한데 그런 것치고는 정말 편안하게도 잤다고 생각하며 소파에 기대어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집 안은 조용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조용히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잠들기 전까지 그들이 앉아 있던 깨끗한 테이블 주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숨을 들이켜는 것만으로도 몸이 꽃으로 가득 차는 기분이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만개한 벚꽃은 하늘빛에 물들어 붉게 보였고, 바람을 타고 떨어지는 벚꽃은 눈처럼 하얗게 보였다.
창문 밖으로 보인 녹색 길 주변으로 피어나 붉은 흔적이 가득한 철쭉꽃은 어쩐지 가슴을 시리게 했다. 그 때문에 ‘무슨 꿈을 꿨었지?’ 같은 생각을 하려다가 그제야 정말 오랜만에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기분 좋게 푹 잤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꿈을 꿨다고 하더라도, 꿈이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아하니 ‘꿈을 꾸지 않았다’고 해도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 생각을 했단 사실이 하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더 나왔다.
소파에서 일어나 나른하게 흘러나오는 하품을 흘려보내고 조금은 뻐근한 몸을 풀면서 집 안을 더 둘러보다가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사람은, 그들은 밖에 나가 있는 걸까?
아직도 잠에서 제대로 깨지 않은 몽롱한 기분으로 멍하니 문을 향해 걸어갔고, 문을 열자마자 눈가에 제대로 쏟아지는 밝은 노을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가늘게 뜬 시야 사이에 익숙하게 너울거리는 옷자락이 보였다. 항상 당연하게 보던 그 사람의 옷자락이 순간 날개처럼 보였다.
날개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연상에 다시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 사람은 평소와 같은 몸짓으로 가볍게 다가왔고, 그 과정에서 팔락거리며 나부끼는 옷자락을 날개로 착각하며 어쩐지 새와 닮았다는 생각까지 하고야 말았다. 새 같다.
“-언제 일어난 거야?”
“……얼마 안 되었, 어.”
새삼스럽게 새의 지저귐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언제나처럼 당연하게 들어왔던 맑은 목소리는 어지럽게 하기 충분했다. 정말 새삼스럽게 다시 느끼는 감각이었다. 매번, 그 어렸을 때부터 가끔 느껴왔던 그 감각을 지금 와서 다시금 느꼈다고 또 새로이 느끼는 감정처럼 정신이 어지러워져서 제대로 제정신을 차릴 수 없다니.
정말 새삼스러워서 웃음도 제대로 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과 다르게 그는 저도 모르게 ‘하얀 마법사’였던 시절에 자주 지어 보였던 다정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 있었다.
“……돌아가요.”
“응?”
“집에, 가자. 우리 집이 있는 그 어두운 평온의 숲에, 그냥 거기서 단둘이 있고 싶어.”
“괜찮니?”
“괜찮아. ……나는 언제나 괜찮았는걸요. 내가 초월자로서 검은 마법사가 되었던 때라도, 그때도 나는 괜찮았어.”
애써 걱정하면서 마음을 써주는 그 사람의 모습에 그것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직도 당신의 눈에는 내가 아이의 모습처럼 그렇게 비치는 걸까요.’ 같은 생각이 들어 어쩐지 섭섭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 같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새 같아요.”
“무슨 말이야?”
“당신은, 언제나 자유로운, 그런데도 계속 자유를 갈망하고 자유를 향해 날갯짓하는 새처럼 보여. 세상의 모든 구속과 속박에 갇혀있을 수 없는, 그 누구도 당신을 구속하거나 명령할 수도 없는 존재라서 그럴까요.”
“여전히 정말 재밌고, 웃기는 상상을 잘하는구나.”
“새보다는 오히려 금방 녹아버리기 쉬울 묵직한 눈덩이에 더 가까울 텐데,” 라며 다가온 그 사람의 작은 손이 뺨에 닿을 듯 가까이 밀착해왔다. 온몸에 솜털이 민들레 홀씨처럼 피어나는 기분이었다. 정신, 차려야 할 텐데. 정신 차리기가 싫은 기분에 정말 이상해진 것 같다.
괜히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져서 호흡이 섞일 것처럼 가까이 다가온 그 어깨 위로 고개를 떨어뜨리고 얼굴을 파묻었다.
옆에서 아직도 계속 꺼림칙한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 역시 아무 시선도 느낄 일 없이 단둘이서만 평온의 숲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지가 강해졌다. 얼굴을 파묻고 있던 어깨에 머리를 비볐고 자신의 손에 절반을 겨우 넘을 정도의 작은 손이 올라와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걸 가만히 느꼈다.
“오늘따라 진짜 제대로 어리광이 심한데?”
“……그러고 싶어졌으니까.”
그 말에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볼 수 없어 몰랐지만, 놀란 얼굴이나 이런 꺼림칙한 시선과 같은 모습일 수 있다고 생각이 들어도 별로 기분 나쁘다는 감각이 들진 않았다.
“그러면 오늘은 귀여워 보이는 어린애처럼 보여도 괜찮은 거야?”
“……마음대로 해. 뭐라도 상관없으니 그냥, 단둘이 있고 싶어.”
“빨리 돌아가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뒷머리를 토닥여주던 손길 뒤에 잠시 가벼운 입맞춤이 다가왔던 것 같았다. 머리카락에 감각이 느껴질 리가 없는데도 입이 닿았다 떨어졌던 부분에서 열이 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어쩐지 목이나 귀까지 화끈거리는 느낌이었다.
“가자…….”
계속 이어진 어리광과 칭얼거림에 도저히 아이에게는 못 이기겠다는 듯한 가벼운 헛웃음을 뱉은 소리가 들린 것 같다.
“아직 어색한 저 애들이 불편해서 가고 싶은 건, 아니지?”라고 작게 속삭여온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면 어떻고 맞아도 무슨 상관일까. 그저 아무런 방해 같은 것도 받을 일 없이 단둘이서만 있고 싶은 마음에, 눈을 감고 말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면 다행이긴 하지만…… 이제 다음은 없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건 없니?”
“마지막?”
“라니아…… 그러니까 루시아에게 있어선 별다른 유감이나 아무런 감정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초대를 받아 놀러 올 수 있었지만, 나 역시 메이플 월드에 있는 동안은 이 세계의 바깥 사회에 섞여 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고, 아직도 없으니까. 이제는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을 생각인데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들어주려고.”
그저 단순하게 마지막으로 뭔가 하고 싶은 걸 들어주려는 것보다 무슨 일을 하려고 하던 그의 마음대로 자신이 의지를 갖추고 그 사람에게 요구하거나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마지막으로 어떤 부탁이든 들어주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다음에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제한하겠다는 소리인 것 같은데, 당신 뜻대로 움직이게 하고 싶은가요?”
마음을 비우려고 하진 않았지만, 말을 하면서도 머리가 차갑게 식어가며 어지럽던 마음이 정리되는 기분이라 조금 곤란해져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묻게 된 것 같다.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정말로 당황했다는 기색이 확연히 드러나는 두 사람의 기척과 그가 한 일은 없다고 한들 자신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것 같은 루미너스의 불편한 감정이 흘러들어오는 기분이 느껴져서.
“……그것도 얼마 안 가겠지만, 그래. 전부 마지막이지.”
조금 재촉하듯이 다시금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건 없니?”라고 묻는 모습이 아쉽게 느껴졌다.
“마지막, ……이라면 어렸을 때부터 꼭 하고 싶었던 말이, 있어요.”
“뭔데? 왜 그때그때 말하지 않고?”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계속 당신을 자유로운 새 같다고 생각했었고 그런 당신의 알 수 없는 모든 행동과 모습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좋았어요. 부러웠어.”
그때 느꼈던 이상하다고 여겼던 감정들을 몰랐고 그런 감정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할 수 없었던 말을, 지금 와서 한다고 해도 앞으로 상관없이 지낼 수 있을까. 말을 하는 것, 아니면 하지 않는 것 둘 중 무얼 골라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면 후회를 하게 될까.
“마지막이니까, ……내 의지조차 제한하려고 하는, 제한하고 싶다는 당신한테 전할 수 있는 건 지금뿐일 것 같아서.”
“뭔데?”
“왜, ……왜 그때 나를 도와줬어요? 왜, 아무 기억도 없이 백지상태의 나를 거둬줬었나요? 왜, 나한테, 내가 알 수 있게, 내 앞에서 그런 연구를… 그런 일을 했던 건가요? 왜, 왜…… 내가 그런 운명을 걷게 내버려 뒀다가 나중에서야, 마지막까지 가서야 구해준 이유가 뭐죠?”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듣고 있는 모습에 봇물 터지듯이 하고 싶었던 말과 하려고 했던 말이 아니었던 것까지 이것저것 아무 말이나 튀어나와 다시 알 수 없는 그 의미 불명의 감정까지 같이 흘러나온다. 대체 뭐라고 하는 거지.
“사람을 설레게 하고, 기대하게 할 만한 모습과 행동으로 기대하게 했다가, 마음을 접고 포기하고 싶어서 포기하려 할 때 왜 그만둘 수조차 없게 다시 나타났는지, 정말, 당신을 알 수가 없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당신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대체 어떤 마음으로 나를…… 나와 같이 시간을 보내고 같이 지냈던 건지, 왜 나를 당신의 자유분방한 영혼과 운명에 섞이게 만들어서 이렇게, 이렇게…… 나를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닌 것으로 만들게 된 건지 모르겠어. 왜, 그랬는지 알려줄 수 없는 건가요?”
그 말을 끝으로 한참이나 침묵으로 조용해진 사이에 겨우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는 것처럼 다시 머리가 맑아져 이상하게도 울렁거리는 마음이나 감정을 정리할 수 있어서 마지막답게 제대로 갈무리하려고 했다.
“그런 당신이라도, 나는 동경했어요. 부러운 만큼 그런 당신이 좋았고, 당신처럼 되고 싶었어.”
의지와 다르게 마지막으로 나온 말을 뱉어내자 속에서 열기가 확 치솟아 올라 도저히 정리할 수가 없어. 이제, 평온의 숲으로 돌아간다면 더욱 돌이킬 수 없을 텐데. 저제와 같을 수 없을 거야.
‘여태껏 느꼈던 기분이나 마음, 감정, 의지 모든 걸 전부 버리고 당신만을 위해 지내게 되어야 할 텐데. ……왜. 왜, 지금 와서.’
그나마 할 수 있다는 선택이라도, 오버시어에 의해 멋대로 결정되어버린 운명을 강제적으로 걷게 되던 때와 다르게 그 사람만을 위한 선택을 하는 건 나쁘지 않았다. 그때와 다르기 때문에 차라리 모든 걸 전부 버리기 위한 각오 같은 건, 당신만을 위해 한 번만 하는 거로 끝내버리고 싶은 생각까지 드는걸.
그런데, 대체 왜 마음을 정리하기가 이렇게 어려운지, 욕심을 낼 처지도 아닐 텐데 이렇게 욕심내고 싶은지. 확인할 수도, 확신할 수도 없어서 더 감정이 울렁거리는 것 같다.
“왜 그랬어요?”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음을 단단히 다지고 각오할 수 있었던 것 같았는데.
“……확신이, 잘 안 섰거든.”
“……? 뭐가?”
“내가 아는 네 모습은, 사실 정말 단편적인 것뿐이라 정확히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네 운명을 비틀어줄 수 있고, 그 운명을 걷게 되지 않아도 될 수 있게 해줄 수 있어도, 어디서부터 그래야 할지 몰랐었어. 아직도 잘 모르고 있지. 나도 이게 좋은 선택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그래도 지금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을 거고, 현재를 후회할 일 같은 건 없을 거야.”
그 사람은 이미 자신의 운명을, 그가 걸어 나갈 미래의 일들을 알고 있었던 게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신이 알고 자신은 모를 그의 다른 모습과 다른 미래에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몰랐다고 고백하는 모습은 모든 감정이 한순간에 녹아내리게 될 수 있었다.
“……이제 알았어. 우리는, 그동안 대화가 필요했던 걸, 대화를, 하면서, 말로 풀어놓았을 것이 더 좋았을 텐데. 그걸, 이제야…….”
“……미안해. 그렇지만 사람과의 관계는 언제나 어려워서, 언제나 처음이라 뜻대로도 잘 안 되는 게 인간관계인걸.”
사람이 사람을 만나 관계를 맺는 계기는 다양하다. 시작은 인상적일 수도, 별 것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관계를 지속해나가기 위해서는 서로 간의 의사가 잘 전달되는, 의사 전달을 할 수 있는 대화가 필요하다. 대화가 없는 관계는 금방 끊어질 수 있는걸.
“돌아가요. 다시, 돌아가.”
평온의 숲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꼭 평온의 숲이 아니어도 좋을 것 같아.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