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로아카 이이다 텐야 연인 드림
 *소꿉친구AU


 (1)

‌ 그 날은 중학교 3학년으로 진학하기 전 마지막 방학이었다.

‌ 대뜸 류코에게 불려나온 이이다는 그 상황 자체를 딱히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류코는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곧잘 저를 찾았으니까. 이번에는 아마 본격적인 수험 생활이 시작되면 이전처럼 자주 만날 수 없으니 아쉬운 마음에 불렀으리라, 이이다는 그리 가볍게 생각했다. 하지만 제 맞은편에 앉은 류코의 입에선 미처 상상치 못한 말이 나왔다. 나 전학 가.

 “어제 아빠가 대뜸 이사 간다고 하더라고. 내가 전학은 싫다고 했는데 거리상 무리래. 아, 텐야. 주스 흘렸어.”

  아무 말 없이 눈만 깜빡거리다 류코가 건넨 냅킨을 무의식적으로 받은 이이다는 번뜩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가, 갑작스럽다.”
 “그러니까. 이런 건 일찍일찍 말해주면 좋을 텐데, 아빠는 너무 속으로만 생각한다니까. 어차피 너나 나나 수험 때문에 얼굴 보기 힘들 거라 생각하긴 했는데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니까.”

‌ 상대에게 별다른 말이 돌아오지 않자 류코는 몸을 기울여 이이다의 안색을 살폈다. 이이다는 멍하니 어딘지도 모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얘, 왜 이래? 걱정되는 맘이 들은 류코는 이이다의 이마에 가볍게 손을 대봤다. 다행히 열은 없었다.

 “텐야, 어디 안 좋아?”
 “아, 미안. 좀 충격 받았나봐.”

‌ 류코의 온기가 남은 이마를 괜히 어루만진 이이다는 의아함을 느꼈다. 내가 왜 이렇게 충격을 받지? 잠시 말없이 눈만 깜빡인 이이다는 이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아, 그래. 나는 단 한 번도 류코와 떨어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어.’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유치원에서 만난이후 한 번도 멀찍이 떨어져본 적이 없었다. 같은 유치원, 같은 초등학교, 같은 중학교. 반이 갈라진 적은 있었지만 특별한 이유가 없는 이상 등하교는 항상 함께 했었다.

 “류코는 덤덤해 보이네.”
 “음, 어차피 라인이나 전화하면 되고. 게다가 고등학교 올라가면 다시 볼 수 있으니까.”

‌ 류코가 그리 말하는 이유는 두 사람 다 유에이를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이다는 프로 히어로를 목표로 히어로과에, 류코는 히어로 사무소 경영을 위해 경영과에. 머리가 제법 무거워진 시절부터 줄곧 하던 말이었다. 사실 이이다가 이별을 생각해본 적 없는 이유 중 일부는 이 약속 때문이었다. 수험 생활은 물론 고등학교 생활도, 그리고 그 후에 미래도 두 사람은 함께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당연했던 생각이 깨져버리니 당황스러워도 어쩔 수 없었다.
‌ 이이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지 류코는 태평하게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나도 꽤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류코는 그리 운을 뗐다.

 “저번에 모의고사 결과가 아슬아슬해서 게임도 아예 끊었어! 진짜! 게임칩들도 다 아빠 책상 서랍에 넣어놨어!”

‌ 그러니 꼭 유에이에서 만나자. 그리 말하며 류코가 환하게 웃자 이이다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이이다에겐 유에이에 입학해야만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겨난 것이었다.



 (2)

‌ 자유를 트레이드마크로 내건 유에이의 입학식은 상상 이상이었다.

‌ 별도의 입학 안내 대신 개성을 파악하겠다는 이유로 다짜고짜 운동장으로 불려나가 온갖 체력 테스트를 마친 이이다는 류코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 있었다. 전화기 너머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류코는 꽤 놀란 눈치였다. “입학 안내도 제대로 안하다니, 자유로워도 너무 자유롭네.” 류코네 반은 중학교 때와 별 다를 거 없이 학교생활에 대한 안내와 커리큘럼이 담긴 책자를 받고 귀가하였다는 모양이었다.

 “아, 나 전화 온다. 이만 끊을게, 조심히 들어가.”
 “응, 알았어. 너도 푹 쉬어.”

‌ 그 말을 마지막으로 통화를 마친 이이다는 저를 향해 느껴지는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던 급우, 미도리야 이즈쿠와 우라라카 오챠코가 저를 슬쩍 곁눈질로 보고 있었다. 아차, 사람을 옆에 두고 너무 오래 통화했나? 이이다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미안, 통화가 좀 길었지?”

‌ 두 사람은 별 다른 말 대신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응? 무슨 의미지? 이이다가 의문을 표하기도 전,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우라라카였다.

 “이이다군, 여자 친구 있구나.”
 “응?! 아, 아냐, 그냥 친구야!”

‌ 그제야 그 미소가 무슨 의미인지 파악한 이이다는 얼굴이 시뻘개졌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소꿉친구도 이번에 같이 합격했거든. 친구는 경영과. 다른 반은 어떻게 했는지 궁금해서….”
 “소꿉친구랑 같이 합격한 거야? 대단하다!”

‌ 그리 말하던 미도리야는 자신의 소꿉친구가 떠올랐지만 필사적으로 외면했다. 이이다군의 소꿉친구라니 어떤 사람일까? 이이다군이랑 비슷한 느낌이겠지? 이런저런 얼굴을 떠올리던 미도리야는 그 소꿉친구가 제 동창이란 사실을 얼마 안가 알게 된다.


 “저기, 이이다 텐야 있어?”

‌ 입학하고 나서 며칠 후 일이었다. 하교 준비로 소란스러운 사이, 활짝 열려있던 뒷문에 빼꼼 나타난 여학생이 가장 가까이 있던 우라라카에게 그리 물었다.  “응? 이이다군? 잠깐 교무실에 갔어.” “아, 그래?” “노트를 제출하러 간 거니까 곧 오지 않을까?” 두 사람이 그리 대화를 나누자 근처에 있던 몇몇이 흥미가 생겼는지 저들끼리 한두 마디 말을 얹었다.

 “누구지?”
 “경영과 애 같은데?”
 “쟤 올마이트 딸 아니야?”

‌ ‘올마이트 딸’, 딱히 귀 기울여 듣고 있던 건 아니었지만 문득 스쳐지나간 단어에 미도리야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도리야가 올마이트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올마이트 매니아인 점도 있지만 올마이트의 딸이라면 그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류코상?”
 “미도리야, 너도 A반이었구나?”

‌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에 미도리야는 가방을 마저 메고 뒷문으로 향했다. 꽤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고 우라라카가 물었다.

 “데쿠군, 아는 사이야?”
 “응, 중학교 친구야. 근데 류코상, 이이다군이랑은…?”

‌ 미도리야는 뒷말을 흐렸지만 의미는 뚜렷했다. 중학교 동창이 연이 없어 보이는 급우를 찾는 이유가 궁금할법하지. 류코는 잠시 어찌 대답해야할지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여자친구?”

‌ 그 대답이 그리 큰 소리도 아니었는데 다들 어찌 들었는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그 이이다의?! 만난 지 며칠 안 됐지만 이미 이이다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을 마친 친구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학업을 중시하느냐 교제라면 극구사양할 거 같은 애가 여자친구를?! 게다가 상대가 딱히 모범생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무엇부터 꺼내야할지 몰라 터지기 일보직전 분위기를 바늘로 찌른 건 다름 아닌 이이다였다.

 “류코?”

‌ 익숙한 목소리가 낯선 이름을 부르자 이번엔 모두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교무실에서 돌아온 이이다는 앞문에 어정쩡하게 서있었다.
‌ 교실에 들어오기 직전에 류코를 발견한 모양인지 교실과 복도에 애매하게 걸쳐져있던 이이다를 향해 친구들이 우루루 몰려갔다. 처음 보는 애한테 차마 그러진 못하고, 익숙한 급우를 달달 볶기를 택한 모양이었다.

 “반장, 너 여자 친구 있었어?! 왜 말 안했어?”
 “연애 얘기 해줘!”
 “이이다쨩, 의외네.”
 “뭐? 여자 친구라니?”

‌ 이이다가 한껏 당황하는 모습을 모던 류코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다가 이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다소 경쾌하기까지한 웃음소리에 모두 다시 류코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게 뭔 일이래. 서로 눈치만 보는 친구들 사이에서 대충 상황 견적을 마친 이이다가 류코에게 외쳤다.

 “류코, 장난이 지나치잖아!”
 “아하하, 반응이 너무 재밌는걸.”

‌ 뭐가 그렇게도 좋은지 웃다 못해 이내 배를 움켜쥔 모습을 지켜본 미도리야는 하하, 너털웃음을 지었다.

 “역시 농담이었구나.”
 “데쿠군은 알고 있었어? 난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응, 류코상은 장난을 자주 치거든.”

‌ 친구들을 진정시키고 도로 제자리에 돌려보낸 이이다가 성큼성큼 걸어와 류코 옆에 섰다.

 “대체 왜 온 거야?”
 “대체 왜 왔냐니, 당연한 걸 묻네.”

‌ 같이 돌아가려고 왔지. 그리 말하며 류코는 미소 지었다.



 “이이다군이랑 류코상이 소꿉친구라니, 신기하다!”

‌ 류코와 이이다에 대해 들은 미도리야는 감탄했다. 제 중학교 동창과 고등학교 급우가 소꿉친구일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옆에 있던 우라라카도 같이 신기하다며 박수를 짝짝 쳤다.

 “텐야는 히어로로 일하고 나는 기획사 경영. 옛날부터 이렇게 말했었어.”
 “유치원 때 꿈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중이네! 대단하다, 류코쨩!”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야, 오챠코.”

‌ 통성명을 마친 류코와 우라라카는 죽이 잘 맞는지 벌써 십년지기 친구처럼 굴었다. 저들끼리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문득 생각났는지 류코가 미도리야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미도리야, 이제 비실비실 걷지 않네?”
 “응, 이제 체력 트레이닝에 익숙해졌으니까!”

‌ 우라라카와 이이다가 무슨 뜻이냐는 듯 눈짓하자 류코가 답했다.

 “얘, 중학생 때 운동하느냐 맨날 비실비실 다녔거든. 금방이라도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그 정도는….”
 “그 정도였어.”

‌ 서로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꽤나 친해보였다. 같은 반은 아니었던 모양인데, 어떻게 친해졌을까. 그리 생각하던 이이다는 저가 알지 못하는 1년의 공백이 왠지 찝찝했다. 류코에 관해서라면 저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자신 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러지도 못하게 되었으니. 1년이면 잠깐이라 생각했는데 그 간격이 제 생각보다 훨씬 커다래 보였다.
‌ 괜히 씁쓸해진 입 안을 잊기 위해 애꿏은 안경만 고쳐 잡던 이이다의 손에 무언가가 톡, 하고 떨어졌다. 그 감촉을 느낀 이이다가 제 손을 펼쳐보자 바람을 따라 흩날리고 있던 벚꽃잎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꽃잎?”

‌ 이이다가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멈추자 그 사실을 알아차린 우라라카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이다의 시선에 따라 본인도 꽃잎을 바라보던 우라라카가 갑자기 생각난 듯 말을 꺼냈다.

 “그 얘기 들었어?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데.”
 “첫사랑….”

‌ 별다른 대답 없이 유난히 한 단어만 곱씹어보는 이이다의 모습에 우라라카가 히죽 웃었다. 그의 미소를 눈치 챈 이이다가 머쓱했는지 괜히 고개를 반대로 돌리며 말했다.

 “우라라카군 왜 그런 눈으로….”
 “이루어지면 좋겠네!”
 “응?”
 “힘내, 이이다군!”

‌ 잠깐, 우라라카군! 무슨 의미야? 이이다가 다급히 우라라카를 불렀지만 그는 이미 미도리야와 류코 옆에 붙어 자연스럽게 대화 속에 들어가 있었다. 멍하니 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이다는 한숨을 푹 쉬다가 벌어진 거리를 따라잡기 위해 힘찬 돋움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