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모든 걸 치유한다 하지만, 때로는 모든 것을 악화시키기도 했다. 아무도 도와주러 오지 않는 봉인뢰 안. 고독과 공포 앞에서 오직 서로만 의지하던 왕혁과 담운은 시간이 흐를수록 몸도 마음도 서서히 붕괴되어갔다.
 아니, 정확하게는 이미 무너지고 있던 왕혁이 제 손을 잡아준 이를 똑같이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하는 편이 더 정확할까.
 처음에는 그저 제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할 수 있었던 그는, 곧 자신의 유일한 아군이 실제로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이전보다 더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도움도 안 되니 지금이라도 도망쳐라’고 말하다가도, 담운이 조금이라도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면 ‘두고 가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고 소리치기 일쑤였지.
 ‌매일 밤 찾아오는 두려움과 자가당착. 소중한 이가 제 손을 놓지 않길 바라는 마음과, 소중한 이이기에 자신과 같은 꼴로 만들 수 없다는 마음이 서로 부딪혀 날카롭게 깨지는 것이 반복되는 나날. 왕혁의 정신이 거의 무너져 내리고, 담운의 정신력이 한계에 다다랐을 즈음.

 “어머, 가여워라♥”

 위선의 구세주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봉인뢰 안으로 발을 디뎠고,

 “─이 몸이 도와줄까앙?”

 ‘왕혁’으로서의 살아갔던 나날이, 그에게 작별을 고했다.

‌두 번째 파편,
봉신계획 시작 후 약 8년하고 몇 개월 째.
─금오도, 십절진 근방.

 문중이 십절진에 유폐된 지 4개월이 흘렀고, 조공명은 제 부하들을 이끌고 태공망 일행을 공격하러 나섰다. 봉신계획이 시작되고 몇 년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인간과 선도가 죽어나가는 싸움이 지속되고 있었지만, 상황이 이렇게까지 긴박하게 흘러간 적이 있었던가.
 모두가 소리죽여 태공망 일행과 조공명의 싸움을 주목할 때, 갇혀있는 문중의 곁을 서성이는 이가 있었다.

 ‘괜찮으실까. 문중 님.’

 십절진의 결계 밖, 주변을 어슬렁거리기만 할 뿐 안으로 침입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담운이 초조하게 제 겉옷을 만지작거렸다.
 ‌비록 직접 만나서 교류한 시간은 길지 않아도, 문중은 담운에게 있어서 몇 없는 소중한 인연 중 하나였다. 처음 금오도에 와 요괴들에게 죽을 뻔 했던 순간 목숨을 구해준 이도 그였고, 지금 입고 있는 이 겉옷을 선물해 준 것도 그였다. 게다가 비록 직접 도와주진 못했었어도, 봉인뢰에서 나온 후 제대로 금오에 적응하지 못하던 자신의 상태를 살펴봐 준 것 또한 그이니 어찌 소중하지 않을 수 있겠나.
 다만 담운에게는 더 소중한 인연이 있어, 아무리 걱정되어도 이렇게 밖에서 서성이는 것 밖에 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지.

 “담운?”
 “!”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급히 고개를 돌린 담운은 낯익은 상대를 보고 뜨거운 숨을 뱉었다. 하나이자 둘, 둘이자 하나인 목소리의 주인은 두 쌍의 눈동자로 담운을 훑어보았고, 이내 거리를 좁혀 상대에게 다가갔다.

 “진천군.”
 “여기서 뭘 하고 있지? 왕천군이 찾고 있다. 여기 있었다는 걸 알면 별로 좋아 할 것 같지 않군.”
 “혁이가?”

 ‘아차.’ 무의식적으로 답한 담운은 급히 제 입을 막았다. 마치 말을 삼키듯, 마른침을 삼킨 그는 힐끔 문중이 있는 쪽을 흘겨본 후 속삭였다.


 “…왕천군에게는 비밀로 해 줘. 부탁할게. 아무 짓도 안 했어.”
 “뭐, 그러도록 하지. 왕천군의 기분이 상해서 득 볼 사람은 여기에 없으니까. 그리고 아무 짓도 안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가 더 잘 아니 변명 할 것도 없고.”

 십절진은 금오십천군 모두의 공간보패를 사용해 만들어진 공간이다. 만약 누군가가 침입하게 된다면, 결계를 친 당사자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공간보패의 사용자인 담운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터. 하지만 굳이 저렇게 말을 덧붙인 건, 반드시 이 방문을 왕천군에게 비밀로 하고 싶었기 때문이겠지.
 자신들은 비록 인간에게 호의적일 정도로 관대하진 않아도, 굳이 집단의 리더를 화나게 만드는 바보는 아니었다. 게다가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을 정도로 사이가 나쁘지도 않았으니, 저 부탁을 거절할 이유가 있겠나.

 “고마워. 그럼, 왕천군에게 가볼게.”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한 담운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 ‘흐음.’ 높고 낮은 목소리가 마치 하나인 것처럼 겹쳐져 들리는 진천군의 앓는 소리는, 명백하게 의문과 흥미를 담고 있었다.
 자신들은 담운이 누구인지, 어떻게 인간주제에 금오도에 와있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정확하게 말해선 자신들 뿐만이 아니라, 금오도의 대부분의 선도들이 담운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지. 그나마 그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건,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왕천군이나 문중 정도일까. 저 멀리 사라지는 담운을 지그시 바라보던 진천군은 마치 서로 대화하듯 중얼거렸다.

 “문중도 인간이니, 역시 문중을 연줄로 들어온 건가. 하지만 문중의 편이었다면 구룡도의 사성과 지냈을 터. 정작 담운은 늘 왕천군의 곁에만 있지. 곁에만 있는 게 아니야. 아예 왕천군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는, 한심한 꼴로 지내고 있지 않나?”

 역시 왕천군에게 묻는 것이 좋을까. 평소엔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던 사실이 오늘따라 눈에 밟히는 건, 아까 전 상대가 중얼거린 호칭 때문이리라.
 왜 담운은 무의식적으로, 항상 왕천군을 유래도 유추할 수 없는 별칭으로 부르는가.
 그걸 알게 된다면 무언가 실마리가 보일 것 같기도 한데.

 ‘당사자에게 물어봐야 어차피 왕천군이 끼어들어 훼방을 놓을 터. 그걸 아는 이상, 굳이 돌아갈 이유가 없지.’

 왕천군은 누군가가 담운의 정체에 대해 물어보는 걸 싫어했지만, 자신들은 그렇게 대놓고 진실을 들춰보려고 하는 게 아니었다. 궁금한 건 그저, 두 사람이 무슨 관계냐 하는 정도였지. 정말로 딱 그 정도가 궁금해서, 진천군은 조금 위험한 도박을 해보기로 했다.
 서로를 마주보며 웃은 진천군은 자신들의 거처가 아닌, 손천군의 거처로 발걸음을 돌렸다.

‌❋  ❋  ❋

 “왕천군. 이거, 할 줄 아나?”
 “아…?”

 왕천군은 진천군이 내민 작은 상자 모양의 장난감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뭔데?’ 대답이라기 보단 혼잣말 같은 대답을 한 그는 조심스럽게 장난감을 집어 들었다. 색색의 작은 상자조각들이 뭉쳐 하나의 정사각형을 이루고 있는 장난감은 여러 가지 색이 한 면에 어지럽게 섞여있는 상태였다.
 수상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을 걸 보아하니 보패는 아닌 것 같지만, 제게 왜 이걸 가져온 것인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상대를 보자, 진천군이 해명하듯 설명을 덧붙였다.

 “손천군이랑 내기를 하게 되었거든. 그 퍼즐을 푸는 게 우리의 승리 조건이고.”
 “너희들 내기에 날 끌어들이는 건가?”
 “적절한 상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 또한 개인의 전략이지. 우리 중에서 제일 머리가 좋은 건 너니까, 너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마지막 문장은 거의 감언이설이 따로 없다. 물론, 본인이 머리가 좋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왕천군은 저런 칭찬을 듣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장난감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왕천군은 대답을 내뱉는 대신 묵묵히 퍼즐을 맞춰나갔다. 달각달각. 조각들이 움직이며 나는 간지러운 소리에 진천군은 미소 지었다.

 “모든 면을 단색이 되게 맞추면 된다.”
 “말하지 않아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어.”
 “그런가.”

 아무리 십천군이라는 이름 아래에 뭉쳐있긴 해도, 자신들은 그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다. 그냥 같은 집단 안에 있을 뿐 평소엔 대화도 잘 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별다른 대화 주제가 없을 경우엔 이렇게 침묵이 이어지는 쪽이 자연스러웠다.

 “담운은 만났나?”

 당연시하던 침묵을 깬 쪽은 진천군이었다. 왕천군은 잠깐 퍼즐을 돌리는 손을 멈췄다가, 이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장난감을 움직였다.

 “그래. 네가 알려줬다고 하던데.”
 “마주친 김에 말해 준 것 뿐이지만.”
 “그래서? 감사라도 해주길 바랐나?”
 “그건 아니다. 군말 없이 부탁을 들어 준 정도면 충분하니까.”
 “착각하지 마. 이건 시간 죽이기로 승낙 한 거니까.”

 과연 그럴까. 사실 여부는 말을 꺼낸 본인밖에 알 수 없지만, 진천군은 그가 남의 부탁을 쉽게 들어 줄 정도로 친절한 성격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는 항상 저런 식이었다. 말로는 담운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제게 어떤 영향도 주지 않는다는 듯 말해도 행동은 늘 말과는 정 반대로 드러났다. 보이지 않으면 찾으려 들고, 남이 함부로 자신들의 관계에 대해 궁금해 하면 쉽게 표정을 찌푸리고…, 그렇다고 당사자를 소중하게 대하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담운은 지나칠 정도로 왕천군에게 무른 면을 보였어도, 왕천군은 언제나 제 좋을 대로만 담운을 대했으니까.

 “잠깐 들렀다 갔나? 같이 있을 줄 알았는데.”
 “오늘따라 말이 많은데, 진천군.”
 “가만히 있으려니 따분해서.”
 “뚫린 입이라고 말은….”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는 경쾌하진 않았지만 노여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상대의 기분을 살피며 하려던 말을 고르던 진천군은, 문득 아까 전 일을 떠올리고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담운은 문중의 밀정인가?”

 달그락. 요란한 소리와 함께, 퍼즐을 돌리던 왕천군이 고개를 들었다.
 무심코 힘을 준 탓에 큰 소리가 난 건 알지만, 타이밍도 참 나쁘다. 진천군은 비틀린 모습으로 멈춘 장난감의 모습에 무심코 자신을 투영하고 마른 침을 삼켰다. ‘잘못 건드렸다.’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말을 끊으면 정말로 모가지가 비틀어질게 뻔했다. 지금 필요한 건 침묵이 아닌 변명이었으니까.

 “문중이 막 십절진에 갇힌 날, 담운이 몰래 침입해서 문중과 대화한 적이 있지 않았나? 그게 생각나 물은 것뿐이니까 표정 풀지 그래.”
 “…참 빨리도 묻는군? 벌써 4달 전 일이다만.”
 “단 둘이 있을 기회가 없었으니까. 아니면, 다 같이 모여 있을 때 말하길 바랐나? ‘내가 채근할 테니 신경 꺼라’고 한 건 너였을 텐데.”
 “잘 아네. 신경 끄지 그래?”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묻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담운이 적이라면 최소한의 대비라도 해야 하니 결과를 공유해달라는 이야기일 뿐.”

 금오삼강 중 하나인 문중은 분명 인간계에서 은의 태사로 지내면서도 알게 모르게 금오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기에, 십천군들의 입장에서는 반가울 게 없는 상대였다. 좀 더 직설적이게 말하자면, 경쟁자라던가 내부의 적이라고 까지 말할 수 있는 상대였지. 즉 진천군의 요구는 그리 불합리하지 않다는 의미였다.
 왕천군은 장난감을 쥔 손에 힘을 풀더니, 시선을 돌리며 답했다.

 “글쎄다.”
 “지극히도 애매한 대답인데.”
 “나라고 그 녀석에 대해 다 아는 게 아니니까. 쓸데없는 짓은 못하게 하지만, 내 눈을 피해서 뭘 하고 다니는지 까지는 모르지.”

 이 대답은 의외다. 진천군은 진심이냐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담운이라면 네가 싫어하는 일을 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리고 너희는 대부분은 지나칠 정도로 붙어있지 않나?”
 “지나칠 정도로 붙어있다는 게 진짜 어떤 건지 모르나 본데, 아예 네 녀석처럼 하나도 둘도 아닌 상태가 아닌 이상 그런 표현은 그만 뒀으면 하는군.”
 “그럼 아예 묶어놓지 그러나.”
 “됐어. 그렇게 안 해도 붙어있을 놈이니까.”

 그리 길게 대화한 것도 아니지만 벌써부터 말에 묘한 모순이 생기고 있다. 아까 전에는 제 눈을 피해서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꾸미고 다니는 것처럼 말하더니, 지금은 또 물리적인 제약을 걸지 않아도 자신을 떠나지 않을 것처럼 말하고….
 갈피가 잡히지 않는 대화 속, 진천군은 아직 색이 정렬되지 않은 퍼즐을 확인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아직 여유는 있었으니까.

 “어쨌든 적은 아니라는 건가?”
 “그래. 그냥 그렇게 생각하라고. 확실히 문중이랑 쓸데없을 정도로 친하긴 하지만, 그 녀석은 사심 때문에 나를 배신할 정도로 간사하진 못해.”
 “너를 향한 사심이 더 크니까?”

 대답은 곧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흐음.’ 의미를 알 수 없는 추임새를 흘린 왕천군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소릴 하려고 이런 핑계를 준비해왔나?”
 “응?”
 “누굴 바보로 아는 것도 아니고…. 무슨 이야길 하려나 싶어 기다렸더니.”

 설마, 다 알고도 어울려 준 거였나? 제가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어서 온 거란 걸 처음부터 알고서?
 쓸데없는 수작을 부린 걸 들킨 진천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지만, 왕천군은 달리 화를 내지도 정색하지도 않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말 나온 김에 묻지. 네 녀석 눈엔 어떻게 보이나?”
 “뭘….”
 “뭐긴 뭐야. 그 녀석이랑 내 관계 말이지. 남에게서 답을 구하기 전에 스스로 생각정도는 해봐야 하지 않나?”

 이건 또 무슨 변덕인가. 평소엔 누군가가 담운에 대해 이야기 하는 걸 못마땅해 하면서, 지금은 대놓고 질문해오다니. 이래놓고 나중에 칼로 찌르려는 건 아닌지 무서워진다. 진천군은 잠깐 당황했지만, 곧 평소 생각하고 있던 걸 그대로 말로 내뱉었다.

 “네가 담운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담운은 널 소중하게 여긴다 생각하는데.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헌신적이지 않나?”

 과장 하나 없이 표현하건데, 담운은 왕천군을 위해서라면 정말로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것은 단순한 충성심이나 공포에 짓눌린 순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지극해서, 아무리 봐도 낯간지러운 감정을 가진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지.
 요괴인 자신들은 잘 모르겠지만, 인간은 사랑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치기도 했으니까. 담운도 그런 것이 아닐까. 진천군의 추측은 낭만적이었지만, 왕천군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그래?”
 “뭐 어디까지나 내 의견이지만. 반면 너는 별로 담운을 귀중히 여긴단 느낌은 없지.”
 “귀중히, 라.”

 이 대화를 빨리 끝내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대꾸하기 싫어서 다른 일에 집중하고 있는 걸까. 아까 전까진 느릿느릿 장난감을 돌리던 왕천군의 손이 점점 빨라졌다.
 대체 그에게 담운은 어떤 존재기에 이러는 것인가. 평소에는 어느 요괴들이나 마찬가지로 잔혹하고 냉정하게 굴면서, 왜 담운의 앞에서만 이렇게 인간처럼 구질구질하게 구는 걸까.
 멋대로 휘두르다가, 또 남이 경솔히 대하는 건 가만두지 않고. 곁에는 두고 싶어 하는데 상냥함을 베풀진 않고, 그러면서도 마음이 내키면 입술을 부비거나 잡아끌어 허리에 손을 두르고….

 “충분히 귀여워하고 있다 생각했는데.”
 “그건 네 기준 아닌가? 그리고 귀여워하는 것과 귀중히 여기는 건 다르다, 왕천군.”
 “귀하게 여기지도 않았다면 진작 숨통을 끊었겠지.”
 “마치 그 목숨이 제 것인 마냥 이야기 하는 군.”
 “내 거다만.”

 마지막 대답은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조금의 빈틈도 없이 파고든 대답의 단호함에 진천군은 할 말을 잃었다.
 하긴, 제 물건이라면 귀엽게 여기든 마음대로 다루던 주인 마음이니 상관없겠지. 남이 뭐라 하는 게 싫은 건 단순히 소유욕 때문에 그런 걸지도 모르고, 죽이지 않는 건 소유물을 망가뜨리기 싫은 거라 생각하면 그만이다.
 그렇지만 단순히 그렇게 단정 짓기엔, 손 안의 장난감을 내려다보는 그 시선이 너무나도 어수선해서.

 “이봐.”

 진천군이 침묵의 무게를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쯤, 왕천군이 돌연 물어왔다.

 “만약 네 녀석들 중 한쪽이 출구가 없는 공간에 갇혔다고 가정해 봐. 여성체 쪽이던 남성체 쪽이던 상관없어. 어차피 네 녀석은 둘이서 하나지만…, 그냥 가정이니 마음대로 상상해. 어쨌든. 공간보패나 뭐 그런, 나갈 곳이 없는 공간에 갇혔다 치자.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나머지 한 쪽이 갇힌 쪽을 찾아오는 거야. 그러곤 ‘함께 나가자.’ 라던가 ‘내가 같이 있어줄게.’ 같은 소릴 하는 거지. 정작 나갈 방도는 자신도 모르면서. 그저 안심시키겠다고 그렇게 지껄여 버리는 거야.”
 “무슨….”
 “일단 마저 들어.”

 막힘없이 술술 중얼거리며, 왕천군은 계속해서 장난감을 만지작거렸다. 퍼즐은 이제 거의 다 완성되어서, 조금만 더 손보면 모든 면이 같은 색으로 정돈될 것 같았다.

 “…어쨌든, 그런 상태로 오랜 시간이 지나서 내가 누구고 상대가 누군지 모를 정도로 긴 단절과 고독이 이어지고…, 다 죽어버려라 싶을 때 쯤 누군가가 너희를 꺼내주는 거야. ‘너희를 이렇게 만든 놈들에게 복수하자’라면서. 그리고 맨 먼저 갇혀있던 놈에게 묻는 거지. ‘그런데, 왜 네 옆의 그 애는 널 꺼내주지 않은 거니?’ 라고.”
 “…….”
 “자,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질문이야. 먼저 갇혀있었던 녀석 입장에서 대답해. 너는 나머지 한 쪽에게 고마워 할 건가? 아무리 엿 같은 상황이라도 같이 있어줬으니까? 아니면 꺼내주지도 못할 거면서 뭣 하러 같이 있어서 기대를 품게 했냐고 화낼 건가? 그것도 아니면, 다른 놈이 구하러 올 때 까지 아무것도 못한 점을 증오한다던가? 내가 미쳐가고, ‘자신’을 잃어가는 동안, 그저 듣기 좋은 말만 해준 위선자이지만, 그래도 결국은 유일하게 곁에 있어주었고 앞으로도 곁에 있겠다는 녀석을…. 어떻게 생각할래?”

 지나치게 긴 질문이지만, 그 길이만큼 내용은 상세했다. 마치 직접 겪은 일을 서술하듯이, 감정적이고 한쪽 입장으로 치우친 상세함이긴 했지만… 그렇게 서술한 것도 다 이유가 있겠지.
 잠깐 상황에 이입해 생각하던 진천군은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는지 엉뚱한 소리를 내뱉었다.

 “꼭 우리로 생각해야 하는 건가?”
 “그건 왜?”
 “다른 사람이었을 때랑, 우리일 때의 대답은 다를 테니까.”
 “그럴 거였다면 애초에 다른 놈으로 가정했겠지. 너희에게 중요한 건 너희밖에 없지 않나?”
 “…….”

 그러니까, 어찌 되었든 처음부터 중요한 사이로 가정하고 한 이야기였다는 건가. 진천군은 다시 한 번 질문에 이입하려다가, 이 상황 자체에 이상함을 느끼고 생각의 회로를 틀었다.
 왕천군은 제게 갑자기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
 질문의 내용은 어째서 한쪽 입장에서만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는가.
 어째서 다른 누구도 아니고, 굳이 중요한 사이라는 가정을 깔고 답하게 하는가.

 “왕천군.”

 아. 이 목소리는.
 진천군은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얼어버렸다. ‘쯧.’ 들으란 듯 혀를 찬 왕천군은 색이 정돈된 퍼즐을 그에게 던져버렸다.

 “꺼져. 질문은 잊어버려.”

 ‘죽고 싶지 않으면.’ 마지막 경고는 멀리 떨어져있는 담운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날카로운 시선과 말투에 진천군은 고개만 끄덕여 대답했고, 장난감을 든 채 뒤돌아섰다.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것은 아까 전부터 이 대화의 주제가 되었던 인물이었다. 멍투성이인 손을 매만지며 다가온 담운은 진천군에게 가볍게 목례하고 왕천군의 앞에 섰다.

 “다녀왔어. 이야기 중이었다면 잠깐 나가있을까?”
 “됐어. 하려던 말은 다 했으니까. 안 그래? 진천군.”
 “…아아, 그렇지.”

 말끔하게 맞춰진 장난감과 담운을 번갈아본 진천군은 원하는 답을 얻어냈다는 듯 싱긋 웃고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