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방학인데도 전 왜 출근해야 해요?”

‌ 의미 없는 질문이 상담실을 맴돌다 교수님의 귀에 들어갔다. 교수님은 질문의 의도가 뭔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읽던 책을 덮으며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자네가 조교니까 그렇지. 싫으면 그만두던가.”
 “저만큼 유능한 조교가 또 어디 있다고 내쫓으시려는 거죠? 가지 마, 하고 잡아야 정상 아닌가요? 그래도 애인인데!”
 “지금은 일 중이잖나. 그런 감정은 다 배제 해야지. 그리고 유능한 조교라면 꽤나 있을 텐데.”
 “뭐라고요?”
 “자네 학년에 자네만큼 유능한 조교가 없을 뿐이야.”

 욕인지 칭찬인지.
  한숨을 푹 쉬며 밖으로 나갔다. 교수님은 어디가나? 하고 물으셨지만 담배 피러 가는 건 아닙니다. 하고 성의 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두어 개 사서, 다시 돌아가려 하다가 로비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의자에서 소파로 교체한지 얼마 안돼서인지 털썩 앉으니 살짝 튀어 오르는 듯했다. 내 마음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처럼.
  총 학생회장으로서도 할 일이 많은데, 조교까지 하려니 일이 장난이 아니었다. 처음에 공약을 걸때는 의지와 재력만 있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용강대의 복지 강화를 내 걸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런 간단한 의자, 책상 바꾸기 밖에 없었다. 내 재력으로 더 많은 걸 해결 하려했지만 학교의 학생이 쓰는 것은 도리어 횡령 쪽으로 걸릴 수 있다고 하여 총장님과 교수진들을 설득하여 바꾸는 것 밖에 되지 못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학생들에게 미안한데, 조교의 일까지 하려니 부담감이 느껴졌다. 단순히 프로스트 교수님이 보고 싶어서 지원한 내가 멍청했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가끔은 칭찬도 받고, 내담자가 없으면 상담실에서 뽀뽀도 하고 그랬지만 요즘은 스킨십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듯했다. 말하는 것도 쌀쌀 맞아지고 은근히 비꼬는 것이, 내가 예민해서인지 정말 마음이 변한 건지 알 수 없다. 장난도 안 받아주고. 친구들이랑 7월에 여행 간다고 해도 갔다 오라고만 하고, 어디가나 묻지도 않는 게 서운하다.
  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손끝이 따끔 할 만큼 차가워져 커피를 옆에 두었다. 한숨이 훅 떨어지고, 울 것 같아 괜히 마른세수를 했다. 눈을 감고 다시 생각했다.
아까 일도, 나오기 싫다는 말이 아니라 단지 상담소는 원래 방학 때 닫혀있는데 왜 여기서 하냐는 이야기 였는데.
 헤어지실 준비 중인 걸까. 그게 아니면 정으로 사귀는 걸까. 부정적인 생각밖에 안 들었다.


  “신아야.”


  교수님의 목소리에 눈을 뜨고 잠깐 올려다보았다. 그것도 잠시, 내 눈에 서린 괴로움을 들킬까봐 고개를 숙였다. 교수님은 한참 말이 없으셨다. 내가 부름에 대답하는 걸 기다리는 듯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으니 교수님은 한숨을 푹 쉬셨다.


  “역시 이런 거 적성에 안 맞아. “


  내가 우리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서일까. 그 말이 내 고민에 답을 내려주는 듯 한 생각이 들었다. 뭐가요, 왜요. 그렇게 대답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 일어나서 아무 말 없이 상담실로 걸었다.
  한 서른 발자국 떨어져서야 교수님은 다시 입을 열었다.


  “로드 스터디, 아. 아니, 나랑. 데이트 하지.”
 “퇴근 후에 약속 있어요.”


  없는 약속을 만들어 내어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 했다. 살짝 돌아보니 교수님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늘 좋다고 해주니 너무 쉽게 보는 것 같다. 하긴, 이렇게 까지 반항한 적 없었으니까.


  “그럼 지금 퇴근하지. 약속은 언제인가?”
 “5시 반이요.”
 “그럼, 서둘러야겠군.”
 “뭘요?”
 “있어. 관찰력이 부족한 자네에게 가르쳐 줄게 남았네. 여행을 가기 전에는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뭐지?
 어색하게나마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 장난을 치는 건 아닐 거고, 어쨌든 내 화를 풀어주고 싶다는 건가?
 할 수없이 ‘가방 챙겨서 나올게요.’ 하고 상담실 안에서 가방과 노트북을 챙겨 나왔다. 교수님은 소파에 놔두었던 캔 커피를 들고 나와 발맞추어 차로 걸음을 옮겼다.

 *


  “어디 세워요?”
 “저 꽃집 앞에.”
 “저긴 갓길이라 주차 안 되고요. 먼저 내리세요. 저는 근방에 주차하고 올게요.”
 

 평소 같으면 아니, 같이 주차하고 가지. 라고 말했을 교수님이 순순히 내리신다. 뭐지, 오늘 우리 기념일도 아닌데. 그렇다고 내생일은 아직 20일 가까이 남았고.
 나와 상관있는 일이면 좋을 텐데.

‌ 근처 백화점 주차장에 주차하고 꽃집으로 갔다. 꽤나 큰 꽃집, 그 안에서 꽃다발을 들고 있는 교수님은 화원중앙에 있는 석상 같았다. 그 고혹적인 외모는 내 안에 엉겨 붙은 것들을 서서히 떼어내고 있었다. 내가 들어오자 큰 꽃다발을 내밀며 웃는 그 미소도, 오해들을 사르르 풀어주며 괜히 눈물샘을 자극했다.

 “장미꽃 100송이라네. 자네가 내게 해준 것보다는 작은 양이지만, 그 안에 있는 말도 중요하지. 백퍼센트 완전한 사랑 이라고 하던가, 내게 자네는 그런 의미야. 사랑이란 감정조차 모르던 내게, 사랑을 가르쳐 준 건 신아 너야.”
 “교수님…….”
 관계가 소원해졌다고 느꼈던 건 나 하나만의 생각이었다. 꽃다발을 품에 안으니 왼쪽 손을 내밀어 보라고 하여,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손을 내밀었다. 왼쪽 약지에 반지가 끼워진다. 겉은 눈꽃이고, 속에는 별이 있었다. 눈꽃이 지켜주는 별 같다. 각 모서리마다 작은 루비가 빛나고 있었다. 힐끔 내려다보니 교수님의 손가락에도 같은 반지가 있었다.
 “그동안 쌀쌀맞게 군것도 사실 이것 때문이었다네. 어떻게 자네가 나를 밀어내는 시간과 딱 맞추었군. 이런 이벤트는 처음이라 주변 사람들한테 물어보며 준비했어. 서툴러서, 괜히 기분만 나쁘게 한 것 같아 미안하네. 그냥 나대로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나봐.”
 “전, 그것도 모르고……. 괜히 섭섭해 했잖아요.”
 “뭐, 자네가 관찰력이 좋았으면 이미 내 마음을 읽고 걱정도 안했겠지만.”
 “교수님 하극상 한번 당해보실래요?”
 “웃으라고 한 말이네. 사랑해, 강신아.”
 교수님은 내 손등에 키스하고, 일어서서 꽃집을 나갔다. 장미꽃을 받은 것은 좋지만 걸어 다니기 힘들어 차에 놓아두고, 손깍지 끼고 걸어 다녔다. 여태 쌓여온 불만을 주절거리며 백화점 안에 있는 카페에서 한참을 떠들었다. 그러다 문득 아까한 말이 생각이 나서, 사실대로 이야기 했다.
 “교수님, 사실 아까 친구 만나러 간다는 거 거짓말이었어요.”
 “안다네. 그래서 더 서둘렀지. 자네를 영영 떠나보내기 싫으니까.”
 “에이, 설마 제가 그 정도로 삐쳤겠나요?”
 “내가 자네 여행가기 전에 해외로 출장 갔다 오는데, 그 사이에 마음이 바뀌면 어떡하나.”
 “아, 아, 네? 그걸 왜 이야기 안했어?”
 “자네는 당황하면 꽤나 부자연스럽게 말을 놓는군. 이야기 해줬네, 기말고사 전에.”
 “이씨, 그 중요한 걸 기말고사같이 바쁠 때 말하다니 진짜 너무한다.”
 “참, 볼수록 흥미롭군. 신아 너는.”
 “왜, 또 뭐가요!”
 “모든 점이. 전부 다.”
 은근히 능글거리는 교수님을 보니 황당하긴 하지만, 나도 말 안 한 사실이 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제가 교수님에 대한걸 어떻게 잊겠어요. 나도 비행기 표 끊어놨지. 독일에서 만나요, 교수님.’